시를 지으려면
1. 숨은 것을 찾는 눈
삼라만상의 운동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생물의 움직임으로부터 천체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운동엔 어떤 뜻인가가 숨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포기의 풀이 돋아나고,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고,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것도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파란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부는 것도, 그저 무의미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언뜻 보기에는 무심히 떨어지는 사과인데도, 거기서 뉴턴은 날카로운 눈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뜻이 있다는 데에 있지 않고, 있는 뜻을 찾아 낸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어찌, 떨어지는 사과를 본 사람이 뉴턴 한 사람에 그쳤겠습니까? 그 이전에도 수많은 사과가 떨어졌으며, 또한 그것을 본 사람도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사람은 뉴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시인이 하는 일은 물론 과학자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그 속에 숨은 뜻을 새로 발견해 내는 점에서는 둘이 똑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그 발견한 바를 시로 표현합니다. 표현을 통하여 읽는 이의 감정에 호소합니다.
아카시아꽃
햇빛에 눈이 부시다.
푸른 잎 속에 사알짝 숨어
부끄러움을 가득 안은
아카시아 꽃.
고개를 갸우뚱
내다보다가
붙어 오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다.
짙은 향기가
하늘에 흩어진다.
위의 시는 어느 중학 2학년 학생이 지은 시라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같이 보고 같이 들어도 그 대상에서 받아들이는 느낌은 서로 다른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깊고 얕고 넓고 좁은 데에 제각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대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거의 무감각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그저 달이거니, 별이거니, 꽃이거니 하고 그대로 지나쳐 버리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지은 학생은 ‘아까시아꽃’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습니다. 뉴톤이 떨어지는 사과를 바라보듯이 날카롭게 보고 새로 찾은 것이 이 작품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눈부신 5월 햇볕 속에, 잎 사이에 숨어 수줍은 듯 피어 있는 아까시아꽃이 갸우뚱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다가 불어오는 바람에게 그만 들키자, 그 바람을 타고 그윽한 향기를 하늘에 퍼뜨리는 그의 몸짓이 손에 잡힐 듯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아카시아꽃이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 그 숨소리를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그 부끄러워하는 몸짓을 찾아내는 것, 새 뜻을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그 대상의 생명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다른 말로 말한다면, 과학적으로 대상을 냉정히 분석하고 계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작자의 마음을 비추어 보고 작자의 마음과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의 감동을 붙잡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생물학자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뽕잎을 먹고 고치를 만드는 누에의 몸에는 명주실의 성분과 같은 단백질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누에가 먹는 뽕잎에도 명주실과 같은 단백질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에는 뽕잎만을 먹고 독특한 단백질로 된 누에고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만듦새도 예쁘거니와, 누에가 뽕잎만을 먹고 자기 몸이나 뽕잎에 없던 단백질로 된 고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실로 기묘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누에의 생활에서뿐이겠습니까? 자세히 살펴보면, 외계의 것을 섭취하는 모든 생물이 누에에 못지않게 신비롭고 기묘하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정원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장미를 두고 보더라도 땅속에 뿌리박고 자라나는 그는 햇볕과 무기물인 공기와 수분을 가지고서 단단하고 굳건한 유기물을 만들 뿐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풍깁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누에와 더불어 장미를 생각할 때, 시 또한 이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대상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하는 데서 시는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는 대상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하여, 다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창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시를 창조하려면 작자 자신이 따뜻한 애정으로써 대상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애정으로 사물을 대할 때에만 삼라만상은 그 존재하는 의미와 생명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시 속에 깃들인 작자의 마음은 작자 한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전달되어 공명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자꾸 번지어 우리 인류는 그의 정신을 날로 순화하고, 보다 아름다운 꿈을 지니게 되며, 바라는 이상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삼라만상의 움직임엔 모두 뜻이 있다든지, 그것을 찾는다든지, 또는 대상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한다든지 하는 것은 곧 시의 창작에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를 낳는 일, 그 거룩한 작업을 하는 데는 어떠한 길잡이가 필요한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2. ‘무엇’과 ‘어떻게’
시를 낳는 일이란 시를 창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사상 감정을 소리로 나타내는 것이 말이듯이, 이것을 글자로 나타내는 것이 글입니다. 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서는 시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시는 문학의 한 부문이요 문학은 예술의 한 부문입니다.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오늘날처럼 예술이 각 분야로 나눠 있지 않고 문학과 음악과 무용이 한데 어울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원시종합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문학은 문학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무용은 무용대로 제각기 분화되어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처럼 종합예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문학은 시, 소설, 희곡으로 크게 나누는데, 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바로 시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시는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들로 나뉘는데, 시라면 보통 서정시를 가리키게 됩니다. 서정시는 글자 그대로 우리들의 정서와 감동을 간직한 리드미컬한 언어로서 우리들의 사상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의 형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라는 그릇에 우리들의 사상 감정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면 시는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옮겨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엇’이란 그 내용을 이르는 말이요, ‘어떻게’란 그 형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이란 그 시에 담기는 작자의 사상과 감정일 것이며, 형식이란 그 시를 치례하는 겉모양의 짜임새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는 쓰려고 하는 무엇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쓰려고 하는 정신적인 무엇이라는 것이 바로 시의 주제 즉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작품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제가 뚜렷하지 못하면 생명이 없는 작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제는 밖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의 뒤에 숨어 내용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아름다운 능금 속에 자양분이 속 깊이 들어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은 항상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선택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제를 살리지 못하는 내용은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는 옷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학생들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자신들의 실생활에서 보고 느끼고 상상하는 여러 가지 경험에서 결정되리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이 어디까지나 진실해야 할 것 즉 자기 자신의 솔직한 감동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거짓이 기어들어서는 안 되듯이 생활에서 얻어진 사상 감정에 거짓이 있어서는 그것은 엄살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올바른 생활이 없는 곳에 올바른 시가 나올 수 없는 것을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글은 사람이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진실한 밑받침과 풍부한 생활감정 위에 시는 의젓이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항상 주제가 뚜렷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실의 형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주제가 있고 아무리 좋은 재료를 선택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시는 아닙니다. 그것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로서의 형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혼만으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겠습니다. 시는 두 가지 갈래로 나누어 그 형식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윤극영>
이것은 우리가 많이 부르는 ‘반달’이라는 노래의 한 절입니다.
이 노래는
7 · 5
7 · 5
7 · 5
7 · 5
와 같은 글자 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7·5라는 글자의 수는 이 노래의 리듬을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7·5조의 외형률을 가졌다고 할 것입니다. 외형률이란 밖에 나타나는 운율이란 말로서, 어떤 일정한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운율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외형률을 가진 제한된 형식의 시를 정형시라고 합니다.
이 정형시와는 달리, 그 형식에 제한을 받지 않는 시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유시라고 합니다. 정형시가 외형률을 가지는 데 비하면, 자유시는 내재율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꽃씨
꽃 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간 꽃이 피어 있다.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가 숨어 있다.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글잣수에 어떤 제한이 없는 자유로운 형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그 속에 깊숙이 흐르는 운율이 있습니다. 어떤 제한된 음수율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마치 강물이 소리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듯한 운율을 그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재율이라고 합니다.
이 작자는 까만 꽃씨를 바라보고, 그 꽃씨에서 언젠가는 하늘거릴 파란 잎사귀와 빨간 꽃을 보는 것입니다. 더구나 노란 나비 떼까지 찾아내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꽃을 심고 가꾸고 꽃씨를 받는 사람은 많지만, 그 꽃씨에서 푸른 잎과 빨간 꽃과 노란나비 떼를 찾아내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으로 보고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는 시인만이 찾아내는 세계인 것입니다.
더구나 시는 손끝으로 매만진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자기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그렸기 때문에 아무런 구김새가 없습니다. 손끝으로 만지작거린 시는 엄살이 깃들여 있기 때문에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하지만, 이 시는 그렇지 않고 생활에서 우러나와 살뜰한 애정을 거쳐 터져 나왔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시에는 이렇게 다른 형식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어떤 형식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일률적으로 권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작자의 취향에 따라,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좋아하는 형식을 택하거나 알맞다고 생각되는 형식을 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형률을 가지는 정형시나, 내재율을 가지는 자유시나 할 것 없이, 시는 모두 언어로써 구성됩니다. 그래서 흔히 ‘언어의 건축’이란 말을 씁니다. 건축이란 처음 건축가가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을 도면으로 옮기고, 거기에 따라 알맞은 재료를 선택하여 빈틈없는 구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이루어진 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주택이듯이, 시인의 사상과 감정에 따라 언어라는 재료로써 건축한 것이 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바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주택의 목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애써 지은 집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라면, 그 주택은 주택으로서의 생명이 없을 것입니다. 건축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설계와 알맞은 재료와 빈틈없는 구성일 것이니, 그것이 결여된 채로 지어진 주택은 버리거나 다시 뜯어 고쳐야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시를 짓는 데 있어서도, 시의 내용을 지배하는 훌륭한 주제와 거기 알맞은 언어라는 재료의 선택과 이 선택된 재료들의 빈틈없는 구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된 채 지어진 시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훌륭한 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성하는 형식에 따르는 기교가 잘 어울려야 할 것이니 건축 재료에 있어서 목재와 시멘트와 벽돌과 철근이 제각기의 위치에서 역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시는 큰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이 큰 나무에서는 뭇 새가 지저귑니다. 이 시라는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가 바로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나무에서 우는 새들 가운데는 꾀꼬리·소쩍새·부엉이·까마귀· 동박새 들이 있을 것이니,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지 않고 오직 제 목청으로 제 노래를 부르면 곱든 밉든 그 새의 생명은 오래 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를 낳는 마음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중학국어 Ⅱ-Ⅰ 문교부 , 1968, 1970, 15-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