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07년 (1세) | 7월7일(음력) 全北 扶安郡 扶安邑 東中里303- 2번지에서 부친 辛基溫과 모친 李允玉의 3남 2녀중 차남으로 출생. |
| 1915년 (9세) | 부터 문학적 고향인 선은리에 정착. |
| 1917년 (11세) | 부안보통학교 2학년으로 입학. |
| 1923년 (17세) | 6학년이 되는 봄. ‘움모임’이라는 소년단체를 조직, 뜻있는 친구들과 방정환이 주재 발간하던 아동잡지를 읽으며 의기투합, 이해 5월에 가난으로 수업료를 못 내소 있는 한 학생을 일본인 담임선생님이 전체 앞에서 발가벗겨 철조망 밖으로 쫒아내어 다시 개구멍으로 기어들어오라는 야만적인 처사에분개하여 전교생을 선동, 동맹휴학을 일으킴. 이로 인해 무기정학을 당함. 같은 해 두 살 연하의 만경 규수 朴姓女와 혼인. |
| 1924년 (18세) | 11월 24일자「조선일보 」에 ‘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발표. 이로부터 1931년「시문학」동인이 되기까지 7년간 조선, 동아, 중외 등에 80여편의 작품을 발표. |
| 1925년 (19세) | 11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이국자의 노래」를 발표하면서부터 필명 ‘蘇 笛은 夕汀으로 바뀜. ‘夕’은 출생일이 칠월 칠석(음력)인 것과 서해에 지는 낙조에 매료되어 ‘汀’자를 이어붙인 것임. |
| 1927년 (21세) | 3월 1일, 장남 효영 출생 |
| 1929년 (23세) | 11월 1일, 차남 제영 출생. 11월 3일,「동아일보」에 첫 산문시 어머니 그 염소가 웨 ........?」를 발표. |
| 1930년 (24세) | 3월5일 마명 정우홍 소개로 상경, 조선 중앙불교전 문강원 石顚 朴漢永 스 님의 문하에서 불전을 연구. 정지용, 김기림 등과 교유가 시작되고 만해, 춘 원, 요한 등과도 대면을 시작. |
| 1931년 (25세) | 2월 6일(음), 모친 이윤옥 작고. 8월 안서의 소개로 첫시집 「촛불」의 서두 작 「임께서 부르시면」을 『東光』지에 발표. 10월, 「시문학」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면서부터 「시문학」후기 동인 으로 가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함. 그러나 김기림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향리 부안으로 낙향. |
| 1932년 (26세) |
낙향 전후 3여년 동안 10여 두락의 소작농에서 얻은 벼로 선은동560본지에
집을 마련, 이곳을 ‘靑丘園’이라 이름 짓고 본격적인 시작 생활 시작. 노장사상과 도연명, 타고르, 만해에 심취하여 창작에 열중, 초기시의 대표작에 속하는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창작되어짐. 12월 27일, 장녀 일림 출생. 주요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문예월간 1월호), 「봄의 유혹」(동방평론 7,8합병호) 게재. |
| 1933년 (27세) |
김기림이 처음으로 1933년 12월 「조선일보」「시단회고」란에서 석정을 ‘목가시인’으로 호칭하기 시작. 「아 그 꿈에서 살고 싶어라」 (신생 2월호),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대()를지킬수가 있습니까」(삼천리 3월호), 「일광용()」(카톨릭청년 7월호), 「훌륭한 새벽이여 오늘은 그 푸른 하늘을 찾으로 갑시다」 (신동아 10월호) 등발표. |
| 1934년 (28세) |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하드구나」)문학2월호),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중앙일보 3. 20), 「화석이 되고 싶어」 (신인문학 10월호) 발표. |
| 1935년 (29세) | 6월 5일, 차녀 난 출생.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 (시원 2월호), 「밤을 맞이하는 노래」 (개벽 3월호), 「해변즉흥소시」 (시원12월호) 등 발표. |
| 1936년 (30세) | 「수선화」(조선일보 1. 31), 「송하논고()」(중앙 6월호),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여성12월호) 등 발표. |
| 1937년 (31세) | 처녀시집「산호림의 백공작」을 출간키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을 못 이룸. 이후 시집명을 「불」로 고친 후 한글학자 이윤재의 조언에 따라 시 집명을「불」에서 다시「촛불」로 고침. 저자가 직접 출두해야 한다는 전언 에 따라 상경했으나 이루지 못함. |
| 1938년 (32세) | 1월 21일 (음력), 3남 광연 출생. 4월「현대조선문학전집」권(1)(조선일보 출판부)에「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등 6편 수록. 10월,「조선문학독본」(조광사)에「훌륭한 새벽이여 오늘은 그푸른 하늘을찾으로 갑시다」외 2편 수록. |
| 1939년 (33세) | 11월 28일자로 첫시집「촛불」을 인문사에서 간행. 당시의 나이에 맞춰 33 편을 수록.(6.25때 판권을 넘긴 이후의 재판본에서는 3편이 추가되어 36편 이 됨) 10월 말 「학운구락부」(9월호)에 발표한 시「방」이 문제가 돼 당국으로 부터 심한 조사를 받고 풀려남. 「고흔 심장」(조선일보 3.5), 「들길에 서서」(문장 6월호), 「작은짐승」 (문장 8월호), 「방」(학운구락부 9월호),「슬픈구도)」(조광 10월호), 「삼 행시」(시학 10월호), 「슬픈 전설을 지니고」(문장 12월호), 등 문장지를 중심으로 왕성히 발표. |
| 1940년 (34세) | 7월 「문장」지에 게재키로 한「차라리 한그루 푸른 대」가 검열 삭제됨. 「꽃상여 가는 길」(태양 3월호), 「슬픈백서리아()」(여성 4월호), 「애 가」(조광9월호) 등 발표. |
| 1941년 (35세) | 3월 28일, 소연 출생. 「문장」과 「인문평론」이 페간되고 친일문학지「국민문학」으로부터 원고 청탁서가 날아들자 (동년 9월) 찢어 던지고 이후 해방까지 절필함. 이 기간 에 발표된 시로는 「신보로」(조광 42.7) 한 편 뿐임. |
| 1943년 (37세) | 10월 23일 4녀 엽 출생. 이 해 창씨개명을 안한다고 경찰서에서 출두령이 나오자 피신, 8 15 해방 까지 버팀. |
| 1945년 (39세) | 8월 18일,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 결성에 참여. 이날의 의장은 임화. 서기장은 김남천. 예하 단체인 ‘문학건설본부’ 중앙위원장에는 이태준, 서기 장은 이원조 등이 되었음. 9월, 8·15 해방의 감격을 서울에서 펼칠까하다가 뜻을 바꿔 향리에서 ‘중학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여 개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 |
| 1946년 40세) | 3월 1일, 부안중학교가 개교되어 서울 등지에서 교사를 초빙해 왔으나 마땅 ‘국어’ 담당자가 없어 국어교사로 근무함. 그 해 전주여고 강당에서 결성된 「전북문화인연맹」에 채만식(대표), 이병 기, 김해강, 김창술, 백양촌 등과 함께 참여. 7월, 전북 최초의 종합지 「전북공예론」에 「8월 15일을」등의 시작품 발 표. 「삼대」(3.1기념시집), 「꽃덤불」(신문학 6월호), 「八월 十五일을」(전북 공론 7월호),「비의 서정시」(신문예 7월호) 등 발표. |
| 1947년 (41세) |
2월 16일 전주여고 강당에서 결성한 ‘전북문화연맹’에 참석. 7월 25일, 제 2시집「슬픈목가」를 부안 낭주문화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 당시 석정의 시대관과 시의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던 김아(본명, 김태 종)가 서문을 얹음. 「움직이는 네 초상화」 (신천지 2월호), 「네 고향 하늘은 남녁하늘은」(백 제2월호), 「심판」(문학 4월호)등 발표. |
| 1948년 (42세) | 7월 28일, 4남 광만 출생. 11월 10일자로 부안중학교에서 죽산중학교로 부임. 「봉화」 (문장 ‘속간호’ 10월호) 발표. |
| 1949년 (43세) | 8월 31일자로 죽산중학교에서 다시 부안중학교로 옮김, 50년 6.25를 거쳐 9월 30일까지 근무함. |
| 1950년 (44세) | 3월 정음사간행「현대시집」에 김기림, 김광균과 함께「방」을 비롯하여 자 선시 24편 수록. 6월 채만식이 작고. 문인들과 함께 상여를 메고 치상한지 10일만에 향리 부안에서 6.25의 질곡을 맞음. |
| 1951년(45세) | 이 무렵 생활이 너무 어려워 부안에서 단신 전주로 나온 석정은 1930년 불교전문강원 박한영 대사를 소개했던 마명(馬鳴) 정우홍(鄭宇洪1897~ 1949)의 지제인 정환기씨 댁(전주시 고사동 497번지)에서 상당 기간 기거 함. 마명은 일찍이 석전대사로부터 불교철학을 익혔으며 8 . 15 해방시까지 항일운동과 동양철학 섭렵에 일생을 바친 우국지사로 석정에게는 사촌 자형 이 됨. |
| 1952(46세) | 3월 1일 ~53년 11월 30일까지 태백신문사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토요 신단」을 주재. 5월 5일, 「촛불」「슬픈목가」의 재판본이 대지사에서 나옴. 상당부분 내 용이 변개됨. 이해에 부안에서 전주로 전 가족이 이거. 6 25의 상흔을 딛고 재기. 이때부 터 전쟁으로 인한 갖가지 상처와 비애를 ‘사랑의 정치학’으로 각인하기 시 작. 「제주도」(태백신문3.10) 「망향()의 노래」(전북일보 4.5) 「귀향시초」 태백신문 4. 20), 「소양강삼장」(전북일보 8.21), 「근영수제」(전북일보 9)등 20여편을 발표. |
| 1953년 (47세) | 「발음」(전북일보 1.1),「산산산」(학원1월호).「애사 심장」(전북일보 2.2) 「짐승」(국어문학 5호) 등 발표. |
| 1954년(48세) | 3월 1일, 삼남일보사, 편집고문직 피촉. 4월 1일, 이후 7년간 전주고등학교 교사생활. 50년대말 맥락시대 동인지도, 이중 상당수가 중앙문단에 진출. 6월 15일,「중국시집」『대역』을 정양사에서 간행. 「빙하」(삼남일보1.1), 「백목련을 꺾던 밤」(태백신문 4.5) 발표. |
| 1955년 (49세) | 3월 전북대학교와 영생대학에서 ‘시론’을 강의 전북대 재학생으로 이뤄진 ‘청도문학동인회’(황길현, 채만묵, 김종곤, 장태윤, 서완석, 이귀호, 허소라) 고문. 3월 15일 「한국시인전집」(학우사 권1)에 ‘나의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방 ‘등 31편을 수록. 「어린 양을 데리고 」(전북일보1.1), 「망향의 노래」(현대문학 3월호) 발 표. |
| 1956년(50세) | 11월 30일, 제3시집 『빙하』를 정음사에서 간행. 「대춘부」(삼남일보1.1)「역사」(전북대학교 10.30) 발표. |
| 1958년 (52세) | 4월 30일, 「명시조감상」(이병기 공저)을 박영사에서 간행. 6월 5일 「매창시집」(대역)을 낭주매창시집간행위원회‘에서 간행. 동년 「자유문학」지 시추진위원으로 피촉, 백촉(7월호) 추천. 11월 21일 ‘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분)’ 수상. 「축제」(사상계 7월호), 「종소리같은 별빛 속에」(자유문학 12월호) 발표. |
| 1959년 (53세) | 4월 20일, 신구문화사 발행 「한국시인전집」(제5권)에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시작품 수록. 동년 「자유문학」지에 황길현(2월호), 이병훈 (4월호), 이기반(6월호), 허소라(9월호), 김민성(60년 2월호) 등을 차례로 추천하여 문단에 진출시킴. 「나에게 어둠울 달라」(자유문학 4월호),「산은 알고 있다」(문예 12월호) 발표. |
| 1960년 (54세) |
2월2일 부친 신기온 작고. 4월 「동방반명」(1월1일) 등 4월 혁명을 다구치는 시작품들을 「전북대학 교보」등에 이어 연이어 발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온 날 밤엔 만 취 상태로 미원탑 네거리 교통신호대 위에 올라가 윗저고리를 벗어든 채 오 가는 시민들에게 교통신호를 보내며 ‘민중의 승리’를 마음껏 외쳐댐. 11월 5일 「촛불」과 「슬픈목가」의 합본시집이 대문사에서 간행됨. 「단장서곡」(동아일보 3.30), 「사월 혁명에 부치는 노래」(전북대학신문 4.13)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말아라」(눈엽 8월호), 「단식의 노래」(서울 일일신문10) 발표. 「한국의 현대시」(자유문학 5월호) 발표. |
| 1961년(55세) |
5월 5.16 직후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 「단식의 노래」와 혁신계 신문 「민족일보」에 발표한 「춘궁은 다가오는데 」, 「(전아사」등의 작품 때 문에 당국에 구금. 8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남. 8월 25일자로 전주고등학교를 떠나 이후 2년간 김제고등학교에서 교사생 활. 이 무렵 어려움 속에서도 역사현실과의 대결의지로 쓰여진 시 다수 발 표. 이해에 동부노송동 511번지 백에서 길 건너편 남노송동 175의 27번지 소재의 마지막 거처로 이사함. 40여평의 정원을 가꾸면서 당호도 부안 시절 의 ‘청구원’에서 ‘비사벌초사’로 바뀜.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전북일보 1.1) 「봄을 잊을 수는 없다」(전북대학신문 1.16), 「다가온 춘궁」, (민족일보 4.4) 「전아 사」(사상계 5월호), 「단식의 노래,」(서울일일신문 10)등 발표. |
| 1962년 (56세) | 「무명에의 항변()(자유문학 5월호」, 「영구차의 역사」(자유문학 12월호) 등 5.16을 비판한 시 발표. |
| 1963년 (57세) | 8월 초 부안 변산문인협회(회장 김태수)와 전북일보사가 공동주최한 ‘하계 문화강좌’ 강사였던 석정과 조지훈이 변산에서 회동, 2박 3일간 문학과 지 조 등에 관해 정담을 나눔. |
| 1964년 (58세) | 3월 16일 전북대학교 대강당에서「시와 현실」이라는 연제로 전교생 대상 의 특강. 4월 1일자로 전주상업고등학교로 옮겨 72년 8월 30일 정년시까지 재직. 「봄은 있다」(삼남일보 1.1) 「슬픈 서정()」(한양 6월호), 「지리산」(사 상계 12월호) 발표. |
| 1965년 (59세) |
6월 ‘전주시 문화장 수장’ 12월 당국이 국내반입을 규제하고 있는 「한양」지 (일본에서 교포가 간 행)에 시 「그런 날은 언제나 올까」를 발표. (때론 원고를 인편으로 보내 기도 하였음.) |
| 1966년 (60세) | 이후 2년간 (66~67)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 역임. |
| 1967년( 61세) |
이후 2년간 한국예총전북지부장 역임. 2월 월남파병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 시 「꿈의 일부」를 「신동아」지에 발표. 5월 조지훈 시인에게 시집 「산의 서곡」의 ‘서’를 부탁하는 친서를 보냄. 이후 8월 초에 잡문 안 쓰기 로 유명한 병상의 지훈으로부터 정중한 내용의 ‘머리글’이 도착. 동년 10월 30일, 회갑기념으로 제4시집 「산의 서곡」을 전주 가림출판사 에서 간행 (시집 뒤 저자의 인지에 찍힌 한국지도 모형의 인장은 김아가 새 긴 것임) 과 의기투합. 군사정권의 비합법성과 표현의 자유 등에 관해 수시 로 연락을 취하며 비분강개함. 월남 파병을 비판 한 시 「꿈의 일부()(신동아 2월호), 「헐벗은 산하()에 살아도 」(전북일보 3.12) 발표. |
| 1968년 (62세) |
8월 제주도 한라산 등반 이후 한라산 및 제주 풍물에 대한 관한 시 10여편 을 발표. 10월, ‘예술의 기치를 대중 속에’라는 구호를 내걸고 예총 잔북지 부장으로서 ‘한국문학상’ 수상. 「조용한 분노」(현대문학 8월호), 「추야장고조」(교육평론 10월호), 「백록담에서」(월간문학 11월호) 발표.. 중학국어(2), 고등국어 교과서에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수록. |
| 1969 (63세) |
5월,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혹독한 취조를 받고 풀려남. 8월 광주 Y 살롱에서 언론인 초청으로 제 1회 개인 시화전을 개최. 12월 29일, 전주시 다가공원에서 세울 ‘가람시비’ 건립위원으로 피촉. 「서울 1969년 5월 어느날」(월간문학 8월호, 위 남산은 내려오면서 쓴 시),「비가」신동아 8월호 발표. |
| 1970년 (64세) | 4월 13~18일까지 ‘한국시인협회(회장 박목월) 초청으로 서울국립 공보관 화랑에서 제 2회 개인시화전 개최. 11월 30일 박목월 시인협회장의 주선으로 제5시집「대바람소리」를 한 국시인협회’에서 간행. 「대바람소리」(현대시학 2월호), 「젊은 얼굴들」(전북대학신문 3. 17일자),「호조일성」 (전북문학 4월호) 발표. |
| 1971년 (65세) | 4월 말 ‘외솔회’ 전북지회가 결성되고 초대 지회장에 추대됨. 5월 9~15일 까지 ‘전북문인협회’ 주관으로 ‘신석정 시화전’을 서울은행 2층에서 개최됨. 「지리산」 「산방일기」, 「청산별곡」 등 43편이 출품됨. |
| 1972년(66세) | 9월 1일 ‘문화포장을 수장. 9월 5일 전주상업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식. 시론 「시정신과 참여의 방향」 (문학사상 10월 창간호) 발표. |
| 1973년 (67세) |
8월 전주에서 「심상」지 주관으로 박목월 시인과 대담. 이 대담에서 자신 의 삶과 인생, 그리고 시세계에 대한 소회를 진솔하게 토로함(「심상」 1974년 5월호에 수록) 10월 20일 ‘대한민국예술문학상’ 수상. 12월 중순, ‘전라북도문화상’ 심사도중 고혈압증으로 졸도. 산문 「상처 입은 작은 역정()의 회고」(문학사상 2월호)발표. |
| 1974년 (68세) | 7월 6일 0시 20분 영면, 전북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에 묻힘. 동년 7월 24 일자로 유고수필집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이 지식산업사에서 간행됨. |
| 1976년 | 7월, 전주덕진공원 ‘신석정 시비’ 가 건립 됨. |
| 1984년 | 7월 작고 10주기를 맞아 1959년대 석정시인 추천(자유문학)으로 문단에 나온 문하생들로 「석정문학회」(이병훈, 김민성, 이기반, 황길현, 허소라)를 결성함과 동시, 회지 1호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를 간행 |
| 1986년 | 9월 기존의 시비 옆에 동상(배형식 작)을 세움. 12월, 역시 10주기를 기념하여 ‘석정문학회’에서 「신석정대표시 평설」을 유림사에서 간행. |
| 1991년 | 8월, 부안군 변산면 해창 ‘석정공원’에 시비를 건립. |
| 2000년 | 3월 29일 임실 관촌면 신전리에서. 부안군 행만면 서옥부락에 있는 부인 박소정 여사의 곁으로 이장. |
| 2001년 | 8월 24일 부안문화원(원장 김민성) 주최로 제 5회 ‘석정문학회’를 개최. |
| 2004년 |
4월 25일 묘 앞에 비를 세움. 9월 3일~9일, ' 석정문학회‘, “전북문인협회 ”, 전북작가회의 등의 3개 문 학단체의 연합으로 ’신석정시인 30주기 추모문학제를 개최. |
| 2007년 |
9월 14~ 20일 ‘신석정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를 전국규모로 개최. 제 1회 ‘촛불문학상’ 시상. 9월 14일자로 유고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비)을 석정문학회에 서 간행. |
| 2009년 | 4월 『신석정 전집』 (국학자료원) 간행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