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신석정 선생은 1924년 11월 24일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한 이래 1974년 7월 8일 동아일보에 유고시「뜰을 그리며」를 남기기까지 장장 반세기의 시력詩歷을 지니고 있다. 선생은 이 반세기 동안 초지일관 일언지하에 명명지어질 수 있는 시 세계를 고수하지는 않았다. 초기의 친자연의 세계는 ‘숨막히는 현실을 호흡’하는 공동체와 연루되지 않은 세계임을 자각하여 이내 변모되었지만 한국 시문학사는 흔히 이때만을 기억하여 자유분방한 그의 시세계를 ‘목가시’니 ‘전원시’니 하는 한정된 울안에 구속시켜 놓았다.

선생의 명실상부한 문단 활동은 익히 알려진 바같이 1931년 10월『시문학詩文學』3호에 「선물」을 발표하고, 박용철·정지용·김영랑·김기림 등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30년대에 발표된 작품만으로 이루어진『촛불』(1939)을 간행했다. 「임께서 부르시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의 절창이 들어있는 이 시집은 가히 한국시의 규범이라 할 만이다. 이 무렵 석정 시의 이상향 갈구는 ‘오히려 암담한 현실을 이와 같은 아름다운 공간과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그 어둠을 강조한 것’(정한모)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이 시기에도 단지 아름다운 자연만을 읊조린 것이 아니다.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나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등은 망국의 하늘 아래 영위하는 삶이 저절로 뱉어내는 신음소리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이 시기에도 단지 아름다운 자연만을 읊조린 것이 아니다. 「나는 어둠을 껴안는다」나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등은 망국의 하늘 아래 영위하는 삶이 저절로 뱉어내는 신음소리라 할 수 있다.
이후 제2시집『슬픈 목가』에 이르러 선생은 한때 잠시 머물던 자연에서 삶의 공간에 복귀할 것을 다짐하고『촛불』 의 긴 대화체와 ‘어머니’를 결별하게 된다.
이어 8·15해방과 6·25 및 4·19의 격랑을 치르면서, 여성적 내공성內攻性 에 기초했던 초기 시의 속삭임에 어느덧 늠연한 기개에 찬 남성적인 목소리가 섞이게 된다. 6·25의 상흔으로 얼어붙은『빙하氷河』속의 심장은 제4시집『산山의 서곡序曲』에 이르러 어떤 불의나 비가치非價値와도 겨뤄 이겨내려는 격정적인 기세로 연락되어 있는 바, 이는 석정시학에서 시가 화자 개인의 꿈의 산물에서 시대의 다중多衆을 대변하는 공동체의식의 한 소산으로 확장하고 변혁하였음을 뜻한다. 이 무렵에 발표한 「나에게 어둠을 달라」·「전아사」·「쥐구멍에도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노래」·「영구차의 역사歷史」 등의 작품들이 그 좋은 보기이다.
회고컨대 선생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하였거니와, 1940년 7월『문장文章』에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가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자 이에 굽히지 않고 ‘푸른 대’를 ‘조각’으로 둔갑시켜 이듬해 3월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를 동지에 게재시킨다. 그러나 막바지에 다다른 일제는『문장』등을 폐간하고 어용지『국민문학國民文學』을 출현시켜 일문日文으로 시 쓰기를 청탁했다. 선생은 그런 원고청탁서를 찢어버리고 예의 ‘대나무 정신’ 속에서 광복의 날까지 시와 떨어져 살았다.
선생은 “시 정신이 없는 민족, 시 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 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신념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로 통하는 길이다.”라면서 줄곧 지조의 상징으로 ‘푸른 대竹’를 노래하였다. 이가 곧 ‘단 하나의 뿌리의 시인’ (김윤식)으로 지칭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표상으로 ‘대竹’가 내세워졌다면 광복 후 분단의 민족사에서는 ‘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초기 시에서 명상하던 산은 역사적 상흔과 간극을 초월하는 미적 충당으로 흡수되면서 항시 가난한 이웃과 통합하려는 다중과 일치된 휴머니즘이 내재된 산으로 변형된다. 이는 한 시인이 시의 호흡을 그 민족의 역사 현실에 밀착시켜 항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시 정신에서 연유된다고 하겠다.
마지막 시집『대바람 소리』에 이르러선 제목이 보여주듯 현실의 광정匡正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다소 연화軟化된 듯싶다. 이에는 당시 시인의 육체적 고통과 이의 원인이 되는 물리적 박해와도 관련이 있지만 넓게는 석정 시학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한국시의 이원적二元的 경험의 실천화로 판독해도 무방해 보인다. 왜냐하면『대바람의 소리』이후 작고까지 4년 동안 발표된 100여 편의 작품들을 보면, 늑대 떼가 울고 있는 「오한惡寒」이랑 승냥이 떼가 울고 있는 「수선화가 피더니」 등에서 그 시제야 어떻든 현실과의 준열한 대결의 양상을 다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온몸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한편, 역사와 현실의 증언자가 되기 위해선 ‘산山도 강江도 바다도 소리없이 묻히는 어둠을 달라’며 역으로 그 자연을 거부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이어 8·15해방과 6·25 및 4·19의 격랑을 치르면서, 여성적 내공성內攻性 에 기초했던 초기 시의 속삭임에 어느덧 늠연한 기개에 찬 남성적인 목소리가 섞이게 된다. 6·25의 상흔으로 얼어붙은『빙하氷河』속의 심장은 제4시집『산山의 서곡序曲』에 이르러 어떤 불의나 비가치非價値와도 겨뤄 이겨내려는 격정적인 기세로 연락되어 있는 바, 이는 석정시학에서 시가 화자 개인의 꿈의 산물에서 시대의 다중多衆을 대변하는 공동체의식의 한 소산으로 확장하고 변혁하였음을 뜻한다. 이 무렵에 발표한 「나에게 어둠을 달라」·「전아사」·「쥐구멍에도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民主主義의 노래」·「영구차의 역사歷史」 등의 작품들이 그 좋은 보기이다.
회고컨대 선생은 일제 말 협박 강요하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 동안 잠적하였거니와, 1940년 7월『문장文章』에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가 사상불온으로 검열에서 삭제되자 이에 굽히지 않고 ‘푸른 대’를 ‘조각’으로 둔갑시켜 이듬해 3월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를 동지에 게재시킨다. 그러나 막바지에 다다른 일제는『문장』등을 폐간하고 어용지『국민문학國民文學』을 출현시켜 일문日文으로 시 쓰기를 청탁했다. 선생은 그런 원고청탁서를 찢어버리고 예의 ‘대나무 정신’ 속에서 광복의 날까지 시와 떨어져 살았다.
선생은 “시 정신이 없는 민족, 시 정신이 없는 국가는 흥할 도리가 없다.
시 정신의 바탕이 되는 것이 신념이요 신념은 바로 지조로 통하는 길이다.”라면서 줄곧 지조의 상징으로 ‘푸른 대竹’를 노래하였다. 이가 곧 ‘단 하나의 뿌리의 시인’ (김윤식)으로 지칭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표상으로 ‘대竹’가 내세워졌다면 광복 후 분단의 민족사에서는 ‘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초기 시에서 명상하던 산은 역사적 상흔과 간극을 초월하는 미적 충당으로 흡수되면서 항시 가난한 이웃과 통합하려는 다중과 일치된 휴머니즘이 내재된 산으로 변형된다. 이는 한 시인이 시의 호흡을 그 민족의 역사 현실에 밀착시켜 항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시 정신에서 연유된다고 하겠다.
마지막 시집『대바람 소리』에 이르러선 제목이 보여주듯 현실의 광정匡正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다소 연화軟化된 듯싶다. 이에는 당시 시인의 육체적 고통과 이의 원인이 되는 물리적 박해와도 관련이 있지만 넓게는 석정 시학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한국시의 이원적二元的 경험의 실천화로 판독해도 무방해 보인다. 왜냐하면『대바람의 소리』이후 작고까지 4년 동안 발표된 100여 편의 작품들을 보면, 늑대 떼가 울고 있는 「오한惡寒」이랑 승냥이 떼가 울고 있는 「수선화가 피더니」 등에서 그 시제야 어떻든 현실과의 준열한 대결의 양상을 다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온몸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한편, 역사와 현실의 증언자가 되기 위해선 ‘산山도 강江도 바다도 소리없이 묻히는 어둠을 달라’며 역으로 그 자연을 거부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석정 시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통해 보편적으로 소유하려는 미적 이상향을 추구하는 낙원지향樂園志向의 자아와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끊임없이 정반합正反合의 반복적 파도 속에 다져온 시대양심의 구현체로서의 자아가 이루어낸 갈등과 통합의 문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시의 자연서정과 현실 참여라는 이이원적 경험을 외롭게 한 몸으로 흡수 통합하려는 시도였으니 선생은 한국시사韓國詩史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아래는 시인 자신의 자평으로 그의 치열한 삶과 함께 문학세계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느껴보게 하는 글로 시인 자신의 심정과 시의식을 느껴보자.
<상처 입은 작은 역정의 회고 중에서> 내가『촛불』『슬픈 목가』『빙하氷河』『산山의 서곡』『대바람 소리』등 다섯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어언 고희를 눈앞에 바라보게 되었고 그 동안에 겪어 온 역정이란 그대로 탁류의 와중을 허덕이면서도 더욱이 일제시대엔 절망과 암담과 퇴폐 속에서 겨우겨우 여천餘喘을 이어오며 몸부림쳤던 것이다. 일제의 손아귀에 조국이 강점당하고 민족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암흑 속에서 정치 경제의 풍요한 배양토에 뿌리박지 못한 예술의 개화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수적 탄압 밑에서 나의 문학 수업은 시작되었던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한낱 사치스러운 분외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일제 강점 밑에서 이루어진 모든 문화운동은 노예문화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일제의 탄압 속에서 비롯하고 가까스로 성장한 우리 신문학이 남긴 발자취는 그런대로 일본 어족에 고스란히 빨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부리던 처절한 운명을 작으나마 긍지로 돌리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첫 시집『촛불』에 담은 시편들은 모두 이런 어두운 상황(1920년대)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
그 당시(‘촛불’을 발표할 시기) 나는 중앙불전에 적을 두고 석전 박한영 스님 밑에서 불전을 배우는 한편 시문학사를 드나들던 때로 노장철학과 타골을 탐독하면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자주 찾아다니던 무렵으로 이 작품에는 이 두 시인의 시적 기법과 정신이 크게 그 저변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한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받은 영향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일련의 시가 발표되자 안서 사백의 눈에 머무르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목가시인이라는 레테르가 붙게 되었던 것이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뒤이어 편석촌도 ‘소음 난조에 찬 현대 문명의 매연을 모르는 다비테의 행복한 고향에, 피폐한 현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한 개의 안식처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목가는 그 자체가 견지에 따라서는 훌륭하게 현대문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하다.’고 그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부정보다는 긍정이라는 편이어서 망국의 민족으로 태어났으되 쓰러지기에 앞서『촛불』에 담은 작품정신을 내 영원한 인간 수업의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목가적인 전원의 낭만적 신비로운 세계에서 그대로 안주하기에는 일제의 발악은 너무나 서슬이 퍼렇게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
(......)
그 무렵 뜻있는 문우들은 산으로 시골로 뿔뿔이 숨어버렸지만 소위 일급 문인들과 더불어 몇몇 철딱서니 없는 젊은 문학도들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일제 앞잡이의 대열에 뛰어 들어 조국을 패망의 구렁으로 몰고 가는 데 부채질하는 반역을 저질렀으니 가슴 아픈 회고가 아닐 수 없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 덤불에 안겨 보리라.’ 생각했던 해방은 소란한 세월 속에 한동안 실의를 안겨 주더니 뒤이어 민족상잔의 6·25동란으로 역사의 거센 탁류가 이 땅을 다시 휩쓸고 지나갔다.『빙하』는 동란이 지난 뒤 엮은 나의 제3 시집이었다.『촛불』의 목가적 세계에서 다시 인고와 저항의『슬픈 목가』를 거쳐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으니 그 때 나는 쓰라린 생활과 부조리한 사회와 더불어 불행한 민족의 가슴에 부딪치게 되었다.
(......)
드디어『산의 서곡』(제4시집)과『대바람 소리』(제5시집)에 정착하면서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아 의연한 자세로 거칠고 어지러운 현실을 응시하면서 시의 꾸준한 정도를 위하여 사물의 중심에 깊이 파고들어 실상을 바로 파악하고 나아가 파라척결爬羅剔決로써 새로운 역사 창조에 저력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개척하자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다름이 없다.
(......)
올바른 참여의 방향 설정도 없이 허울 좋은 얄팍한 시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퇴영과 안일과 무책임한 순응과 타협으로 전진하는 역사의 치차를 붙들고 늘어져 역행을 일삼기 전에 이미 상실한 그리고 상실하면서 있는 순수를 찾고 수호하자면 이에 따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어늘, 구두선처럼 천만 번 순수를 외어도 순수는 기어들지 않을 것이다. 순수를 가로막는 얼룩진 역사에는 하루 빨리 만가를 보내야 하고 혹시 사탄이 있거들랑 그 가슴에 창을 겨누는 의지로써만 참으로 행복한 인류사회는 건설될 것이다. 일제의 강점에서 민주주의가 찾아낸 조국에 다시 부조리의 좀이 슬거나 말거나 어둠이 범람하거나 말거나 화조월석에 파묻혀 잠꼬대만 할 수는 없다. 건강한 시 정신으로 속정에 국척하는 일 없이 꾸준히 전진을 꾀할 따름이다. 돌이켜 보건대 한 평생을 헛되이 진망塵綱 속에서 허덕인 나의 역정은 그대로 피투성이의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나 내 초라한 그림자를 거두는 날까지 시에 종사한 것을 추호도 후회도 않거니와 차라리 나의 긍지로 삼고 서투른 대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이라면 쉰 목청을 가다듬어 남창지름 못지않게 높고 길게 뽑아볼 심산이다. 항상 심한경정心閒境靜의 맑은 눈으로 대상을 관조하여 시정신과 인간정신이 오차 없이 정비례되기를 다짐하면서 자선자석自選自釋이나마 상처 입은 역정의 하잘 것 없는 회고로 끝맺는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 시의 자연서정과 현실 참여라는 이이원적 경험을 외롭게 한 몸으로 흡수 통합하려는 시도였으니 선생은 한국시사韓國詩史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아래는 시인 자신의 자평으로 그의 치열한 삶과 함께 문학세계를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느껴보게 하는 글로 시인 자신의 심정과 시의식을 느껴보자.
<상처 입은 작은 역정의 회고 중에서> 내가『촛불』『슬픈 목가』『빙하氷河』『산山의 서곡』『대바람 소리』등 다섯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어언 고희를 눈앞에 바라보게 되었고 그 동안에 겪어 온 역정이란 그대로 탁류의 와중을 허덕이면서도 더욱이 일제시대엔 절망과 암담과 퇴폐 속에서 겨우겨우 여천餘喘을 이어오며 몸부림쳤던 것이다. 일제의 손아귀에 조국이 강점당하고 민족의 보전마저 위태로운 암흑 속에서 정치 경제의 풍요한 배양토에 뿌리박지 못한 예술의 개화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일제의 야수적 탄압 밑에서 나의 문학 수업은 시작되었던 것이니 어찌 생각하면 한낱 사치스러운 분외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일제 강점 밑에서 이루어진 모든 문화운동은 노예문화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일제의 탄압 속에서 비롯하고 가까스로 성장한 우리 신문학이 남긴 발자취는 그런대로 일본 어족에 고스란히 빨려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부리던 처절한 운명을 작으나마 긍지로 돌리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첫 시집『촛불』에 담은 시편들은 모두 이런 어두운 상황(1920년대)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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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촛불’을 발표할 시기) 나는 중앙불전에 적을 두고 석전 박한영 스님 밑에서 불전을 배우는 한편 시문학사를 드나들던 때로 노장철학과 타골을 탐독하면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자주 찾아다니던 무렵으로 이 작품에는 이 두 시인의 시적 기법과 정신이 크게 그 저변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한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받은 영향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일련의 시가 발표되자 안서 사백의 눈에 머무르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목가시인이라는 레테르가 붙게 되었던 것이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뒤이어 편석촌도 ‘소음 난조에 찬 현대 문명의 매연을 모르는 다비테의 행복한 고향에, 피폐한 현대인의 영혼을 위하여 한 개의 안식처를 준비하고 있는 그의 목가는 그 자체가 견지에 따라서는 훌륭하게 현대문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하다.’고 그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부정보다는 긍정이라는 편이어서 망국의 민족으로 태어났으되 쓰러지기에 앞서『촛불』에 담은 작품정신을 내 영원한 인간 수업의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목가적인 전원의 낭만적 신비로운 세계에서 그대로 안주하기에는 일제의 발악은 너무나 서슬이 퍼렇게 속속들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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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산山이 흰 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우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삼림처럼 두 팔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튼튼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어찌 생활이 슬퍼서 좋으랴?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너무나 생활은 슬펐기에 슬퍼서는 안 되겠다는 반어요 작은 대로 절규로 보아 좋으리라.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소월의 가락에서도 가슴 속 깊이 흐르고 있는 눈물을 우리는 역력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림칠현을 거문고와 술 속에 묻혀 청담에 탐닉했다고만 몰아세우는 우를 범하기 전에 당시의 정치적 압박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노신魯迅의 지적은 가장 타당한 견해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비록 소극적이었다고는 할지언정….내 머리 우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삼림처럼 두 팔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튼튼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들길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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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뜻있는 문우들은 산으로 시골로 뿔뿔이 숨어버렸지만 소위 일급 문인들과 더불어 몇몇 철딱서니 없는 젊은 문학도들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일제 앞잡이의 대열에 뛰어 들어 조국을 패망의 구렁으로 몰고 가는 데 부채질하는 반역을 저질렀으니 가슴 아픈 회고가 아닐 수 없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 덤불에 안겨 보리라.’ 생각했던 해방은 소란한 세월 속에 한동안 실의를 안겨 주더니 뒤이어 민족상잔의 6·25동란으로 역사의 거센 탁류가 이 땅을 다시 휩쓸고 지나갔다.『빙하』는 동란이 지난 뒤 엮은 나의 제3 시집이었다.『촛불』의 목가적 세계에서 다시 인고와 저항의『슬픈 목가』를 거쳐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으니 그 때 나는 쓰라린 생활과 부조리한 사회와 더불어 불행한 민족의 가슴에 부딪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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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산의 서곡』(제4시집)과『대바람 소리』(제5시집)에 정착하면서 잃어버린 청춘을 되찾아 의연한 자세로 거칠고 어지러운 현실을 응시하면서 시의 꾸준한 정도를 위하여 사물의 중심에 깊이 파고들어 실상을 바로 파악하고 나아가 파라척결爬羅剔決로써 새로운 역사 창조에 저력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개척하자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추호도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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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참여의 방향 설정도 없이 허울 좋은 얄팍한 시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퇴영과 안일과 무책임한 순응과 타협으로 전진하는 역사의 치차를 붙들고 늘어져 역행을 일삼기 전에 이미 상실한 그리고 상실하면서 있는 순수를 찾고 수호하자면 이에 따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어늘, 구두선처럼 천만 번 순수를 외어도 순수는 기어들지 않을 것이다. 순수를 가로막는 얼룩진 역사에는 하루 빨리 만가를 보내야 하고 혹시 사탄이 있거들랑 그 가슴에 창을 겨누는 의지로써만 참으로 행복한 인류사회는 건설될 것이다. 일제의 강점에서 민주주의가 찾아낸 조국에 다시 부조리의 좀이 슬거나 말거나 어둠이 범람하거나 말거나 화조월석에 파묻혀 잠꼬대만 할 수는 없다. 건강한 시 정신으로 속정에 국척하는 일 없이 꾸준히 전진을 꾀할 따름이다. 돌이켜 보건대 한 평생을 헛되이 진망塵綱 속에서 허덕인 나의 역정은 그대로 피투성이의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러나 내 초라한 그림자를 거두는 날까지 시에 종사한 것을 추호도 후회도 않거니와 차라리 나의 긍지로 삼고 서투른 대로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길이라면 쉰 목청을 가다듬어 남창지름 못지않게 높고 길게 뽑아볼 심산이다. 항상 심한경정心閒境靜의 맑은 눈으로 대상을 관조하여 시정신과 인간정신이 오차 없이 정비례되기를 다짐하면서 자선자석自選自釋이나마 상처 입은 역정의 하잘 것 없는 회고로 끝맺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