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半世紀
辛夕汀 <詩人>
南向의 해바른뜰에 天然記念物 [호랑가시나무]가 길차다. 그 푸른 입새를 누비고 선갈색 마루를 얼룩이는 볕뉘의 안쪽에 아담한 書室이 있으니 벽마다의 책꽂이 위를 편액이 두르고 있다. 詩人 辛夕汀씨(65)가 文友들과 더불어 청담하는 방이요 그의 작업장이기도 하는 이 書室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의 발자취를 엮어갔다.
寧越 辛씨 집안은 李朝때만도 19명이 文科及第
“멧돼지 노루 피 먹을 수 있는 것 내 故鄕 겨울 맛”
邊山에 눈이 壯雪로 쌓이는 날이면 어디서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이 사냥꾼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내가 어렸을 무렵만 해도 호랑이 사냥을 했다는 邊山은 秋內藏 단풍과 더불어 春邊山 진달래꽃으로 유명하지만 멧돼지 사냥으로 또한 이름난 고장이다.』고 辛夕汀씨는 언젠가 고향 얘기를 썼다. 『사냥꾼을 따라 약이 된다는 멧돼지피를 먹는다는 것은 호강스런 부잣집 막내동이들의 「스포츠」요, 그 덕분에 멧돼지 고기나 노루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내 고향 겨울의 일미가 아닐 수 없다.』
『온 섬이 살구꽃으로 뒤덮이는 界火島는 어장으로 이름난 섬이기도 하지만 性理學의 대가 전간재(田艮齋)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당시에는 국내 3천여 제자들의 발길이 쉴 새 없었다.』
이 邊山반도의 경관이 上蘇山에만 올라가면 한눈에 훤히 보이는 扶安에서 辛夕汀씨는 1907년의 7월에 태어났다.
『해방 전 오래된 이야기지만 邊山 海水浴場이 첫 개장되던 해에 가람 李秉岐씨를 알게 됐어요. 가람은 益山郡 연산면 태생인데 당시 趙春元이라는 그의 매부가 扶安군수를 지내고 있었어요.
徽文중학선생을 하고 있던 가람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자기매부한테 놀러왔는데 겸사겸사 나를 찾아왔었어요. 내 나이 27살 때로 기억되는데 세 사람이 청요리집에서 인사를 한 뒤부터 평생을 두고 사귀게 된 거예요.』 辛夕汀씨는 詩가 맺어준 인연이었다고 말했다.
扶安에서 농사짓고 있노라니 中學 2학년 모자를 들쓴 徐廷柱씨도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게 되고 張萬榮씨도 자주 찾아와서 놀러가기도 했다.
辛夕汀씨는 처음부터 夕汀은 아니었다.
본명은 錫正이고 아호를 上蘇山의 蘇를 따서 蘇笛이라 했는데 산에서 펼쳐보이는 西海의 저녁놀이 잊을 수 없어 夕汀이라 고쳐부리기로 한 것이다.
扶安은 또한 李梅窓의 고향. 거기에는 지금도 宣祖 6년에 부안 현리 李陽從의 서녀로 태어난 그의 묘가 있는데 흔히들 黃眞伊 <梨花雨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라는 시조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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夕汀은 이처럼 다사로운 고장에서 辛基溫씨(酉山郎士)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辛濟夏씨의 호는 若川이었는데 田艮齋선생이 素庵이라 불러줄만큼 대대로 文士의 집안으로 18대를 이어왔다.
夕汀이 속하는 寧越辛씨 집안에서는 李朝로 접어들면서 19명이 文科에 급제할 정도로 문필에 뛰어난 가계이다.
맏형 錫鉀씨는 일본의 正則學院에서 수업하고 1923년 11월께 關東大震災의 여파로 귀국하고 동생 錫雨는 화가 홍우백씨와 함께 서울의 博文社에서 일보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馬海松씨와 교우가 있던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일본땅이라고는 가보질 못했어요. 도시 扶安에서 태어나서 보통학교를 나온 뒤 농사를 지었으니까요. 그리고선 17살 때 15살 된 朴小汀과 결혼을 했으니 까마득한 옛이야기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아요.』
辛夕汀씨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는 1923년 17살에 朝鮮日報에 詩를 지어 보냈다. 당시의 문화부장은 星海 李益相씨. 그때만 해도 신춘문예니 당선작이니 하는 부장의 눈에 들면 그대로 발표되곤 했었다.
\그래서 辛夕汀씨의 詩 「기우는 해」는 서울은 물론 전국에 소개되어 扶安에 있는 田園詩人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張萬榮TL가 찾아와서 여러번 접촉하는 동안 자기부인의 누이(小汀)를 얻으라는 권유를 피할 길이 없어 夕汀은 결혼한 모양. 그리고선 1930년에 공부하려고 上京해서 東國大學校의 전신인 中央佛敎專門講院에 들어갔다. 『당시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읍니다.石顚 朴漢永 스님의 佛法강의는 들었는데 여기서 老子와 莊子의 철학을 익혔읍니다. 思想이라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자연을 거역할 수도 자연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인간생활의 본바탕이랄까 구김없이 살아나가야 되는 정신을 깨달은 셈이죠.』辛夕汀씨는 그 댓가로 한달에 講院에 쌀 3말과 찬값 50전씩을 납부했는데 서울시내의 보통하숙비는 7원가량이었다고 기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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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이른바 滿洲事變이 터진 해에 그는 朴龍喆 金永郞 등과 어울리면서 「詩文學」의 동인이 되어 작품 「선물」을 발표함으로써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끌었다.
1939년 夕汀이 33살때 처음으로 詩集 「촛불」을 엮어 나이와 맞추어 33편을 수록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마음에든 「대바람소리」가 있다.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먹금은 하늘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菊花향기 흔들리는
좁은 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帝王의 門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中國의 陶淵明이나 印度의 「타고르」를 방불케하는 空間처리가 아니고 뭐랴. 제 1집 「촛불」이 발표되자 가람 李秉岐는 「梅窓雪月」이라 詩集에 적어 넣어 축사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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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詩 한편의 값이 얼마냐구요? 한 편에 7원을 주더군. 쌀 한 가마에 6, 7원하던 때니까 얼마나 후대했는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보통은 한 편에 3원 50전가량 받았읍니다. 1941년에 총독부가 지시한 新體制詩를 써서 무려 1천원을 받은 이도 있었으니 오늘과는 딴판이겠죠』
詩稿料가 좋아서 辛夕汀씨는 扶安에서 부지할 수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니 태평연월이 온 것 같았읍니다. 쌀 한가마에 공정가격으로는 18원, 암시장 값으로는 2백원 했을 때 詩 한편에 보통 3백원씩 했으니 말입니다.
내 詩는 어쩐지 8백원을 내주더군. 7편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나니 이젠 詩人들도 살게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어요. 물론 그런 호경기(?)도 6․25사변으로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지만….』
辛夕汀씨는 1947년 나이 40살이 되던 해에 제 2집 「슬픈 牧歌」를 내놓았다. 나이와 맞추어 40편을 수록한 이 詩集은 田園詩人으로부터 忍苦와 希望을 읊은 생활시인으로 탈바꿈한 내용이었다.
『48년에는 扶安에서 東津江을 건너가면 있는 竹山女中에서 교편을 잡았어요. 봉급을 쌀로 지급해주더군. 거기서 1년 있었지만 이해부터 시작된 교단생활을 지난 8월말에 정년퇴직하기까지 꼬박 23년 계속된 셈입니다.』
辛夕汀씨는 자기의 발자취를 돌이키면서 『문학하는 사람들은 글 쓰는 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지 생활이 안 되니까 신문, 잡지, 토목회사, 군서기, 학교선생을 해야 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문단에 자꾸 無許可建物같은 안이한 작품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미국의 「미시시피」에 살고 있던 작가 「월렴 포크너」는 「케네디」 대통령의 만찬초대를 받고 저녁 한 끼 먹으러 가기에 「워싱턴」은 너무 먼 거리니 사양하겠노라고 거절했다지 않아요.』
『언제나 어느 역사 속에서나 저항정신으로 무장하여 창조적 파괴를 과감히 전개해야겠지 않겠어요. 잃어버린 純粹를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南北共同聲明으로 우리에게는 진정한 言論自由가 안겨진 셈입니다.』
7남매의 아버지 夕汀은 사뭇 밝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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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 중에 全州에 국립전북대학이 생기자 가람 李秉岐씨가 全北大學에 눌러앉게 됐다.
그의 간곡한 요청으로 全北大學에서 夕汀은 詩講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의 학비조달을 위해 전주고교, 전주상고, 전주 永生大學에도 나가지 아니할 수 없는 가파른 생활이 계속됐다.
이 무렵인 1956년에 제 3 시집 「氷河」가 나왔다. 나이 50살이 된 夕汀은 詩 50편을 수록했는데 여기서 그는 世情에도 따뜻한 입김으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려는 차분한 경지를 내보였다.
『내년이면 小汀과 결혼 50년의 金婚이요. 너무너무 고생만 시켜서 金婚 때는 제주도 구경을 시켜줄 참입니다. 제주도는 그동안 3번 가보고 혼자서 한라산도 올라가봤는데 山을 좋아하는 天性때문인지 우거진 수풀 속을 거닐자면 살고 있는 기분이 납니다.』
夕汀은 智異山도 알고 秋史가 가 있었던 淳昌의 龜巖寺도 즐겨 찾았지만 역시 樹種이 1천 7백종이나 문실거리는 한라산이 마음에 들듯.
장남 孝永(46. 농사) 삼남 忠永(光淵)(동아일보 光州주재기자) 사남 信永(光漫) 장녀 一林(全北大 崔勝範교수부인) 차녀 蘭(국민학교교사부인)삼녀 小淵(영월. 상동중고교사) 사녀 葉(간호대졸, 儆新중고교사부인)을 모두 출가시키듯이 그가 손때 묻힌 厚朴나무 40그루도 남에게 나눠주고 지금은 우거진 뜰 속에서도 北美 원산인 泰山木을 아끼고 있다.
夕汀의 詩의 行進은 결코 멎지 않은 체 1967년 6旬기념으로 내보낸 제 4집 「산의 序曲」에는 60편이 수록되었다.
그는 여기서 스스로 自然으로 돌아간 圓熟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의 영원불변한 변천 속에서 生活의 醇化를 호흡할 수 있는 老子의 경지와 同化했다.
세상은 辛夕汀 詩人을 그대로 두지 않고 1968년 11월 20일 「신문학 60년」을 기념하는 전국문학인대회에서 그에게 제 5회 韓國文學賞을 보냈다.
夕汀에게는 이에 앞서 58년에 全北文化賞, 65년엔 全州市文化章이 안겨졌는데 애써 「中國詩集」「梅窓詩集」「名時調 감상」 등의 편저서로 숨어있던 명시들을 발구하기도 했다.
『秋史의 志操에 끌립니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고 海東第一의 秋史體를 확립하지 않았읍니까. 實學면에서 본받을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비는 선비의 마음을 아는 법. 書藝에도 능한 夕汀은 秋史친필의 목각판이 들어있는 「般若心經講義」를 엿장수의 목판에서 발견하고 단돈 10원으로 샀다고 자랑하는 童詩人이다. 주소는 전주시노송동 二七五의 一七. 【徐光云記】
<<주간한국>> 72. 11. 12의 보도
夕汀 선생은 장만영씨와 동서지간이다. 석정의 소개와 권유로 장만영 시인이 석정의 처제와
결혼한 사실이 취재 중 와전되어 기록된 듯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