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문학관 개관 1주년 기념 특별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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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세영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들장미, 필자주)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서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끼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즛이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 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서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어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 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
1.
신석정의 시 세계는 세 시기의 변모를 보여준다. 시집 『촛불』로 대표되는 초기는 식민지의 절망적 상황을 퇴행의 공간에서 초월코자 하는 정신적 편력이 나타나 있다. 유년시절의 어머니와 잃어버린 낙원으로써 고향 혹은 자연에 대한 그리움의 형상화가 이 시기의 보편적 특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원의 실현 불가능함을 깨달을 때 시인은 자신을 에워싼 시대 상황을 직시하면서 자아 정립을 꾀한 제 2시집 『슬픈 목가』의 세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보다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길을 택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독자들에게 매우 친숙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우선 이해에 부담이 없으면 낭송하기에 편한다. 호소력 또한 여타의 시에 비할 바 아니다. 그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시가 서정적인데다가 표현이 난해하지 않고 보편적인 감정을 토대로 해 쓰여졌다는 것 등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체가 지닌 독특한 효과 또한 간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첫째는 사투리의 조신한 사용이다. 원래 표준말은 공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 혹은 내밀한 뉘앙스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 그 함축적인 의미도 사투리만큼 풍부하지가 않다. 언어의 코노테이션이라는 측면에서 표준말은 사투리보다 훨씬 미흡한 것이다. 그러나 사투리는 향토어인 까닭에 서민 혹은 민중의 정서를 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사투리를 공적으로 남용한다면 그 역시 독자들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키기 쉬울 것이다. 일테면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과장 사용하는 것 등이다. 사투리란 어디까지나 지역어이므로 그 과도한 사용은 타 지역 사람의 정서에 낯설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어에서 사투리의 공적인 사용은 어느 정도의 평형감각을 전제할 때만 성공한다. 가령 소설에서 한 지역 인물의 전형을 성격화시키기 위함이라면 사투리는 공개적이고도 당당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처럼 특정한 서정성을 형상화시키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독자의 저항감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구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을 사투리의 ‘조신한 사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겸허한 사용, 또는 쓰는지 안 쓰는지 모를 정도로 내면화되어 시의 문맥에 동화된 사용 등이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는 전라도, 그 중에서도 시인이 태어나 성장한 서행안의 사투리가 조신하게 구사되어 있다. 우선 제목과 함께 본문에서 여러번 반복되고 있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넌즈시’는 ‘넌지시’, ‘고 새빨간’은 ‘그 새빨간’, ‘마서요’는 ‘마셔요’, ‘날어’는 ‘날아’의 전라도 사투리 혹은 전라도식 발음이다. 그러나 이들은 시에서 우선 수적으로 그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문맥에 동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별다른 저항감 없이 독자들의 친화력을 얻어내고 있다. 이렇게 독자들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면서 조신하게 사용된 전라도 사투리는 향토어라는 특성상 이 작품의 화자를 보다 진솔하고 청순한 자연인으로 형상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이 시에서 먼 나라에 대한 화자의 그리움이 보다 간절한 것으로 전달되는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가령 표준말을 깍쟁이처럼 쓰는 세련된 화자-아마도 도시인의 진술과 비교할 경우 분명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둘째 편지체의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화자인 아들이 어머니에게 쓴 한통의 편지로 되어 있다. 이 편지 속에서 아들은 어머니에게 그만이 아는 어떤 ‘먼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그곳에 가 함께 살기를 애원한다. 산문이 아니고 운문이며 시의 형식을 빌리고 있는 까닭에 편지의 공식적 구성은 물론 과감히 생략되어 있다. 예컨대 편지의 도입부에 오는 호칭이나 문후, 뒷부분에 오는 기원이나 사사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인 진술이 편지체로 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편지는 대화의 상대자가 간접화되어 있다. 즉 면전에 있지 않으므로 서로의 의사를 즉시적으로 주고 받을 수 없다. 멀리 있는 상대의 어떤 정황을 가정하고 일방적으로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할 따름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편지의 진술 독백(monologue)체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한편 편지는 순ㅅ누한 독백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독백이란 특정한 상대를 전제하지 않고 화자가 자신에게 하는 말인 까닭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편지는 또한 비록 면전에 없고 간접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사람을 대상으로 진술한다는 점에서 대화(dialogue)체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편지는 독백과 대화의 양면적 특징을 지닌 진술형식인 것이다.
편지의 진술이 지닌 이러한 양면성은 화자의 의사 혹은 감정 전달을 훨씬 절실하게 만든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란 막연한 대상보다 구체적인 대상에서 연유할 때 더 참다워지고 동시에 그 표현에 있어서도 그것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간접화시킬 때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독백은 비정상적이며 대화의 구체적 대상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진술이 독자들에게 화자의 책임있는 감정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한편 대화는 화자의 상대자의 면전에서 자신을 직접 이야기하는 까닭에 감정을 억압하여 내적으로 고뇌하는 즉 절제에 따르는 미학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편지와 같은 경우는 화자가 상대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고민하는 광경을 암시함으로써 이를 유추하는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동정에 빠지도록 만든다.
편지체 진술은 이렇듯 감정 전달 혹은 표현에 있어서 독백과 대화 이 두 가지 형식이 안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한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전제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진술형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령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할 경우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편지로 쓴다든가 종교의 예배의식에서 기도문이 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도문이란 신에게 띄우는 일종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가 편지체 진술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감정 전달에 있어서 호소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이 시의 독특한 음악성이다. 독자들이란 음송하기에 적합한 시들과 쉽게 친숙해지기 마련인데 이 시는 바로 그러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다. 그리고 그 단순성이 바로 대중적인 친화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의 음악성은 여러 가지 형태의 반복에서 온다. 우선 어휘 차원으로써 ‘어머니’, 의성의태어로써 ‘촐촐히’, ‘한들한들’, ‘잉잉’, ‘또옥똑’, 문장차원으로써 ‘부디 잊지 마서요’,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무도 살지 않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이다.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등), ‘……하면 ……하고’(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2장에서 이야기하게 될 절들의 반복이다. 이 작품은 같은 내용을 형상화한 3개의 절들이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반복은 비록 파격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율격적 주조를 이루고 있는 세 마디 분절(‘양지밭에/흰 염소/한가히 풀 뜯고’)의 14 혹은 13음절 시행과 더불어 대단히 음악적인 특성을 자아내고 있다.
2.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진술의 성격상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진다. ①은 화자가 어머니에게 ‘그 먼 나라’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이고 ②는 ‘그 먼 나라’에[ 대한 화자의 설명이며 ③은 화자가 ‘그 먼 나라’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해야 할 일에 대한 언급이다. 이 세 가지 진술이 하나로 통합되어 시의 한 단락을 이룬다. 이 단락은 아마도 스트로프(strophe회전)에 가까운 개념이 될 것이지만 나는 이를 편의상 절(節)이라 호칭하겠다. 예컨대 이 시에서 1연은 ①의, 2연은 ②의, 3연은 ③의 내용을 진술한 것으로 이 세 개의 연으로 된 것이 첫 번째 절이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이와 같은 절의 회전이 모두 세 개 있는데 두 번째 회전은 4, 5, 6연으로, 세 번째 회전은 약간의 변용이 있기는 하지만, 7, 8, 9연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작품은 같은 내용의 세 개의 절이 회전하는 형식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절이 첫 번째 절과 동일하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절에 대해서는 다소의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 그것은 세 번째 절의 ①(7연)의 경우는 앞의 두 절과 동일하지만 ②(8연)와 ③(9연)은 앞의 것들과 표면적으로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첫 번째 두 번째 절의 매 두 번째 연(각각, 2연과 5연)의 진술들은 각각 모두 5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마지막 시행은 ‘아무도 잘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로 ①의 진술 유형이 부가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절에서 만큼은 두번째 연(제 8연)이 6행으로 구성되고 마지막 시행도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로 되어 있어 ②의 진술 유형이 부가되지 않는다. ③의 진술유형을 드러내고 있는 마지막 연 역시 이 세 번째 절에서는 그 앞 절들과 달리 ‘어머니 부디 잊지 마서요/그 때 우리는 ……을 합시다’의 문장형식을 취하지 않고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똑 따지 않으렵니까?’로 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통사론적으로는 이와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고 하나 의미론적으로나 기호론적으로는 이 세 번째 절의 둘째 연이 앞의 두 절의 그것보다 시행 수에서 하나가 더 많다는 것에 대하여는 뒤에서 설명될 것이다.
다음 세 번째 절의 두 번째 연에서 마지막 시행이 앞의 두 절처럼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는 표층적 구조로 볼 때 마치 모르는 것을 묻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그 아름다운 나라에 같이 가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