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略)
신석정에 대한 첫 평가는 김기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1933년의 시단의 회고와 전망」1)이라는 글 속에서 처음으로 석정을 ‘목가시인’이라 부르면서 목가 그 자체가 견지에 따라 훌륭한 현대문명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 된다고 고평하였다.
1931년 「詩文學」지에 「선물」이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한 석정에게 있어, 기림은 30년대 석정시의 유일한 평자가 된다. 이래 기림은 석정을 모더니즘의 구역안에 지속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모범으로 추거해 왔던 바, 이는 30년대말까지 계속되었다.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에서도
辛夕汀은 幻想 속으로 形容詞와 名詞의 非論理的 結合에 依하야 아름다운 象徵的인 「이메지」들을 비저내고 있었다. 그들은 韻文的 리듬을 버리고 아름다운 會話를 썼다.2)
라고 하였는데 이는 시의 모더니티 수립을 위해 주장하고 있던 두 측면, 즉 시의 산문화 내지 회화화와 감상의 배격 및 건강성이 석정시에서 감지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림의 논평은 8․15해방 전의 석정시의 비평을 대표하는 견해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석정은 우리 시문학에 자연친화의 ‘목가시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30년대 사회주의문학측으로부터는 이러한 시작태도가 비판을 받아왔는데, 임화는 정지용, 김기림, 정지용과 함께 석정을 기교파로 몰면서 “기교파는 시의 내용과 사상을 방엽한다”3)고 공박했는가 하면 이상, 지용, 임화 등과 함께 석정을 카톨릭문학파로 지목하여 비판하기도 하였다.
석정의 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첫 시집 「촛불」이 출간된 이후부터다. 그러나 이 무렵의 문단은 아직도 카프계열의 입김이 가시지 않을 때였다. 가령 영랑의 시만 가지고도 박용철의 긍정적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쎈치멘탈한 얇은 소녀취미”4)라고 카프계열의 부정적인 견해가 있으리만치 대립적인 풍토였다. 이러한 두 측면 평가의 관점은 두말 할 것 없이 문학의 본질에 대한 또한 문학의 능력에 대한 종래의 두 극단적인 태도, 이를테면 교훈론과 쾌락론, 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한 견해라 할 것이다. (後略) 연구 전문은 파일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1) 김기림 : 「조선일보」 1933년 12월 7일~12월 13일 연재. 「시론」(백양당 1947)에 재수록시 제목․본문 등에 수정, 가필함.
“그리고 우리는 鄭芝溶씨처럼 現代文明 그 속에서 그 周圍와 自我의 內部에 向하야 특이하고 洗練된 詩眼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現代文明의 雜踏을 멀리 避難한 곳에 한 개의 「에덴」을 陰謀하는 牧歌詩人 辛夕汀을 니즐 수는 업다. 그가는 詩의 世界는 全然 個性的인 것이다. 그는 牧神이 조으는 듯한 世界를 조금도 誇張하지 아니한 素朴한 「리듬」을 가지고 노래한다. 「綠色寢台」 「空想의 새새」 등 그가 쓰는 「이메지」(映像)는 全然 獨創的인 美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躁音亂調에 찬 現代文明의 煤煙을 모르는 「다비테」의 幸福한 故鄕에 疲弊한 現代人의 靈魂을 우하야 한 개의 安息所를 準備하려하고 있다. 그의 牧歌 그 自體가 見地에 따라서는 훌륭하게 現代文明에 대한 間接的인 批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