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허소라 에세이집 「흐느끼는 목마」 (1965. 경화출판사)
수필을 야채요리에 비긴 어느 시인이 있다. 어찌 보면 그 담담한 맛이 야채요리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필의 참다운 맛은 아무래도 산채에서 구하고 싶다. 야채요리가 제 아무리 담담하기로소니 두릅의 그윽한 향기, 더덕의 물씬 풍기는 향기, 취의 산드라운 향기, 향긋하게 감싸오는 고사리 고비의 향기를 당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다.
하기야 곰탕인 체하는 수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쯤 수필이 타락하고 보면 그것은 속중들이 즐기는 동물질이니 역시 수필은 식물질이어야 하고 그중에서도 담담하고 향그러운 산채라야만 감칠맛이 있는 법이다.
본시 산과 들이란 고작 작은 구릉을 사이에 두고 따지는 계외界隈이겠지만 야채와 산채의 계외란 어찌 생각하면 구릉 하나의 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백록담과 천제연의 거리가 아닐까 싶다.
소라는 이미 시집 「목종」으로 그 진한 향기를 발산한 지 오래인 시인이다. 그러기에 소설이나 수필을 전문으로 다루는 들(야野) 사람이기 전에 산사람인 것이다. 또한 그는 두릅순과 더덕뿌리와 취나물에 입맛을 붙이듯 누구 못지않게 도시를 사랑하고 시민을 사랑한다. 그의 도시적인 날렵한 위트는 메이드 인 프랑스도 메이드 인 아메리카도 아니다. 그 근원을 찾자면 바로 가난한 이 나라의 도시와 산으로 가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가꾸는 데도 세심한 나는 그것이 태산목이나 서향에 비길 것이냐?
그는 첫째 언행에 「멋」이 있는 사나이이다. 이제 에세이스트로서의 소라의 발성법이 황량한 들을 오고가는 거위나 까마귀의 그 컬컬한 목청이 아니라 솔 씨를 까먹는 동박새가 아니면 심산유곡을 쩡쩡 울리는 크낙새의 그것이고 보니 더욱 기쁠 따름이다.
수필을 잡문으로 다루는 이 또는 여기로 다루는 이가 많은데 이 땅에도 수필문학이 정초된 지 오랜 오늘날 어찌 그런 조백없는 수필이 감히 문학으로 정립하랴? 그것들은 뒹굴어도 한낱 정착할 길 없는 저 사구의 낙엽에 불과하리라. 어제와 오늘 속물이 낙엽처럼 뒹구는 분지의 소란 속에 소라가 내 놓는 참한 산채에 구미를 돋굴 수 있어 정신위생이 한결 개운한 것은 나 한 사람에 한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직 소라의 산 같은 건필과 전진을 빈다.
1956년 11월 25일
비사벌초사에서 신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