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신과 참여의 방향
- 수필적 노트
오한惡寒
어둔
벌판에서는
늑대 떼가 울고 있었다.
대화도 앗아간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는
잃어버린 새벽의 찌꺼길 안고
무딜 대로 무딘 혓바닥을 깨물면서
우리들은
역시 어둔 벌판에서 울어대는
잔인한 늑대 떼의
잔인한 울음소릴
듣고 있었다.
사뭇
하늘이 누렇게 고여 드는
눈망울 저 속 깊이
아직은 파랗게 남은
한 조각 하늘을 데리고
비만한 어둠에 몰려 간
싸늘하게 식어 가는 대낮을
아아 그 눈망울만은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허덕이면서
거꾸러지면서
되쳐 일어나면서
시체 된 대낮의 엉뚱하게 높은
그 언덕을 넘어가면서
으시시 오는 오한을
우린 자랑하면서 살아도 좋다.
그러기에
한번도 외롭다고 말한 적이 없다.
얼마 전에 에즈라·파운드에 대한 수상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는 보도를 읽은 일이 있다. 내용인즉 그에게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연례행사인 에머슨·도로우 메달을 주어 마땅하다는 제안을 받자 아카데미 이사회에서는 반유태주의를 부르짖었는데 그런 사람에게 인간적이어야 할 상을 줄 수는 없다고 거부한 데서 말썽이 되었던 것이다. 이 상은 200 년의 역사를 가진 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분야에 걸쳐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권위 있는 상이라고 한다.
거부당한 제안자 측의 말인즉 셰익스피어도 고리대금업자였고 루이 페르디난트 셀린 또한 파시스트였으니 그들의 작품의 예술적 가치가 평가받지 말아야겠느냐는 것이다. 루이 페르디난트·셀린도 2차대전 때 반유태주의 사상을 가지고 조국을 점령한 도이치군에게 협력하여 전후엔 유죄선고를 받고 덴마크로 망명을 갔다가 1951년에 용서를 받아 귀국했다는 점에서는 에즈라 파운드와 흡사한 사람이다. 문제는 작품의 예술적 가치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존경할 만한 업적을 남겼느냐에 있는 것이요 따라서 인간적이어야 상을 줄 수 있느냐는 점에 있을 것이다.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그의 손을 거쳐서 비로소 햇빛을 보았다고 하고 또한 그의 작품을 과소평가할 수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는 조국의 적대국의 편에서 조국을 패망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데 부채질한 반역자인데 어찌 존경할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수여할 수야 있겠는가? 아카데미에서 말하듯이 용서한다는 것과 존경한다는 것을 혼동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점인 것이다. 일전 어느 신문에선가 이동주 시인은 시 월평에서 "사도행전"(박두진)을 다루면서 ‘현실참여는 행동으로 하고, 시는 순수 서정시로 써야 한다’는 그 시인 나름의 지론을 써놓은 대문을 읽었는데, "사도행전"은 바로 시인 박두진의 행동이 아니고 무엇일까? 시인에 있어서의 행동이란 바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수 서정시를 쓰건, 참여시를 쓰건 그것은 그 시인의 가장 구체화된 행동임에 틀림없다. ‘참여는 행동으로’ 라면, 에즈라 파운드처럼 무솔리니를 지지하는 방송을 해야만 행동이고 작품을 통해 반유태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는 말인가? 작품활동 역시 무솔리니 지지 방송과 추호도 차등을 둘 수 없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사도행전"이 참여시라면 그것은 바로 박두진이 참여하는 행동인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여시를 사갈시하는 저의에서 나온 경솔한 독단이 아닐는지… 나는 서정시를 반대하자는 것도 아니요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순수 서정시가 전연 참여성을 제거한 음풍농월을 의미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오늘날 시인들은 불행하게도 음풍농월로 만족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해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면서 꾀꼬리는 제 목청을 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꾀꼬리가 제 목청을 내자면 공해의 제거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니 이 작업이 바로 참여로 통하는 길이다. 요는 현실참여의 방향 설정이 문제일 뿐이다. 에즈라 파운드가 그 당시 무솔리니 예찬의 지지 방송이나 작품 활동도 현실참여요 루이 페르디난트·셀린의 도이치 점령군에의 협력도 현실참여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아세곡필로써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원수와 손잡고 불의와 부정을 옹호한 현실참여일 따름이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 K씨는 어디선가 ‘남은 보릿고개를 못 넘겨서 솔가지에 모가지를 매다는 판인데, 낙동강 물이 파아라니 푸르니 어쩌니……’ 하는 창백한 문인들의 글을 놓고 열을 올려 떠들어댄 우리 문단의 작풍이 아니었느냐고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예나 다름없이 낙동강 칠백리 물은 파랗게 흐르고 있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다.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의 생활상에는 눈을 딱 감고 푸른 물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설사 그 아름다운 낙동강의 푸른 물만 보았다고 하자. 그리고 푸른 물만 읊은 너그러운(?) 순수(?) 시인이 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한 시인일까? ‘현실참여는 행동으로 하고, 시만은 순수 서정시로 써야 한다’는 시인이 부조리한 현실 상황에 눈을 감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그 시인이 고집하는 순수 서정이란 따지고 보면 현실도피의 구실에 불과하다.
설령 음풍농월로 현실을 도피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도피의 태도 가운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증오의 감정이 저류하고 있다면 천만 번 다행한 일일 것이나 만에 일이라도 현실순응에 그쳤다면 그에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현실도피건 현실순응이건 그 시인의 시작 활동이 있는 한 그것은 현실참여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현실참여의 농도와 방향이 다를 따름이다. 그 방향 설정이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의 생활상까지 미쳤느냐 아니면 낙동강 푸른 물에만 미쳤느냐에 있을 뿐이다. 주민의 생활상에는 오불관언으로 눈을 감아 버리고…… 그렇기에 우리가 공상하는 세계란 언제나 현실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주어진 현실의 상황 속에 발붙이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갖고 싶어하는 현실을 공상의 세계에 설정해 보는 것이다. 낙동강 유역의 보릿고개를 시인은 시로써 노래하면 된다. 그 유역의 주민을 위해서 구호양곡을 보내 주는 실제의 행동은 정치와 경제가 맡아서 할 일이다.
일찍이 투르게네프는 "사냥꾼의 일기"로 농노해방에 영향을 끼쳐 크게 이바지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지만 농노 해방을 위해 투르게네프가 가두에 나서서 데모를 벌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행동이란 바로 작품활동이면 족하다. 그렇다고 실제 행동에 나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금족령을 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시정신이란 결국 사물의 배후에서 혹은 그 중심에 파고들어 실상을 파악하고 나아가 파이척결爬罹剔抉하는 정신이고 보면 에즈라 파운드식 참여는 전진하는 역사의 치차齒車를 붙들고 늘어져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나아가 새로운 역사 창조의 저력이 될 수 있는 길은 아닐 것이다. 어찌 속정에 국척跼蹐하여 참여의 방향을 그릇되게 설정할 수야 있겠는가?
인간이 기구하고 의욕하는 것을 꿈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꿈의 저변에는 항상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증오가 깔려야 할 것임은 더 말할 것 없다. 이것이 예술가의 소중한 양심으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