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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8 10:50
시의 세계와 현실세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5,746  
본 글은 1959년 8월 5일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입니다.
 
시의 세계와 현실세계
 
인류역사가 비롯한 이래 인간의 표정은 여러 모습으로 이어왔고 또 이어가고 있으나 가장 고귀하고 영원히 이어갈 표정은 바로 예술일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국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도 항상 인간의 의욕은 천국을 갖고 싶어 하고 그런 천국을 지상에 건설하려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들 또한 이 위대한 역사적 작업에 종사하는 선발된 가장 우수한 선수들이니 ‘꿈 꿀 힘이 없는 자는 살 힘이 없다’는 그 꿈을 가장 잘 꿀 수 있는 것도 그들이다.
 
저 산 너머 아득한 하늘가에
행복이 깃들인 곳 있다 하기에
남을 믿고 나두야 따라갔건만
눈물 글썽글썽 되돌아 왔네.
저 산 너머 또 너머 머언 하늘엔
행복이 숨었다고 모두 다 말하지만
 
관념적인 행복의 설정이 쓰인 점이 없지 않으나 칼 부세는 산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이란 천국에나 있으리라 상정하고 그 행복을 지상에 가져오고 싶은 욕망에서 그렇게 외쳐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들은 주어진 오늘을 노래하기에 만족하지 않고 갖고 싶어 하는 오늘을 노래하는 것이니 이를 위하여 시인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현란하게 빛나야 하고 때로는 죽음보다도 도리어 처참해야 하기도 한다. 무지개 같은 찬란한 환상과 공상이란 결국 우리들의 현실생활과 그 생활에 있어서의 희구에 뿌리박고 유래한 도착된 표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일부 시인들은 시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관계를 마치 빙탄불상용의 세계인 것처럼 선량한 착각을 일으켜 시 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이 시인들은 그들이 신봉하는 감정의 순수성을 마치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것처럼 맹신하고 이른바 인스피레이션을 시의 원천이나 되는 것으로 여길뿐더러 이것을 신성불가침의 왕국으로 여겨 이에 군림한 자신은 신의 계시나 받아 흡사히 한 송이의 꽃을 피워내듯이 시를 피워내는 양한다. 이렇게 시의 본질에 역행을 감행하면서도 추호의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시의 세계는 천국도 아니요 극락도 아니다. 따라서 시 또한 천국에서 왕래하는 천사도 아니다. 시는 현실생활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감정의 자유분방도, 상상력의 비상도, 작자의 진실한 마음의 끊임없는 추구도 좋다. 그러나 그 감정을 밑받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성이니 이는 인간의 사상이요 의지요 비판정신일 것이다.
저 피라미드의 삼각형에 비한다면 그 정점에 위치한 감정의 저변에 사상과 의지와 비판정신의 확고한 지성이 기초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감정의 밑받침은 과연 신성불가침의 인스피레이션일까? 아니다. 더구나 신의 계시로 좌우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는 오직 현실생활만이 좌우할 수 있다. 어떤 감정을 서정하는 데, 그것을 일으키게 한 현실사태를 정당히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위와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시에 있어서 리얼리즘의 태도가 중요시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리얼리즘은 시인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거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정당한 인식 위에서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시적 진실로써 표현하는 데 그 의의가 있으니, 부단히 움직이는 현실세계의 발전하는 진도를 은폐시키거나 안이한 생활에 탐닉하는 시는 어떠한 화장술을 빌려 새로운 환상을 제 아무리 독특한 수법으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수아비에 입힌 의상에 불과한 것이다.
시인은 현실과 더불어 같이 움직이며 깊은 통찰에 의하여 그 모순과 발전을 탐색하여 현실을 노래함으로써 역사의 분류 속에서 항상 자기의 모습을 찾고 미래를 발견할 수 있는 시대에 선행하는 예언자이어야 한다.
우리들의 의식 아래서 전개되는 세계를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의 내부세계 곧 꿈을 현실로 끌어 올리려는 시적행위는 끝내 시인을 예언자의 위치에 자리잡게 하였다. 현실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과 부조화를 해결짓는 데는 예언자로서의 시인은 저항정신이 필요하다.
 
비라도 봄비이니 맞아 두자.
 
라는 시의 구절을 읽는다거나 또는
 
비가 옵니다.
뜰 우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를 읽을 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정서세계일까 하고 감탄하게 된다. 현실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요 도취적인 세계의 존재를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미의식을 그대로 구가하기에 치우쳐 너무나 처절한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행복한 시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와중에서 우리는 무작정 낭만을 배설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만족할 수 없거니와 독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늘의 시가 목적의식을 거세하고 다만 공상적인 자연발생에서만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니 현실적 비판과 사회적 관심 즉 현실에의 참여가 요청되는 까닭은 봄비라서 그대로 맞아둘 수도 없는 것이요 봄비는 그대로 기쁨 속에서만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니 오늘의 봄비는 한 그루의 나무와 한 포기의 풀 위에 보슬보슬 내림으로 하여 싹을 트게 하고 열매를 약속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방사능을 가지고 오는 일면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이 무서운 방사능을 지닌 봄비를 맞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봄비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로 다른 각도에서 노래해야 될 중대한 임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성립되는 근원에는 크건 작건 현실에의 저항과 대결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식만이 이 지옥 같은 현실세계를 시의 세계로 대체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배양토에 뿌리박고 성장하는 시의 거목에서 몸서리치도록 슬프게 울든 목이 터져라 기쁘게 노래하든 그것은 한 마리 새로서의 시인이 향유한 자유다. 다만 그 노래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데서만 의의가 있을 따름이다.
마치 18세기적인 미의 최고정점에까지 도달한 베토벤과 괴테가 그 절정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 같은 앞뜰에서는 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미의 사도 슈베르트와 하이네가 새로운 세대의 체온을 예감하고 새로운 미의 역사를 마련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