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잊었으나 그 누구인가 ‘시는 거대한 수목과 같다’고 말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수목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새들이 날아와선 노래하고 노래하다가는 날아가는데 그 새 속엔 부엉이도 꾀꼬리도 카나리아도 앵무 내지 까마귀도 있다고 한다.
우리들 시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나 시를 공부해서 장차 시에 종사해 보겠다는 사람들도 확실히 이 거목에서 노래하는 한 마리의 새임에는 틀림없다. 그 누가 과연 꾀꼬리나 카나리아가 될 수 있고 또 앵무나 까마귀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이 뒤에 말해 줄 역사에게 송두리째 맡겨 두기로 하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시는 관찰이나 실험이나 기술과 설명에서 얻을 수 없는 다시 말하면 과학으로 구명 완성시킬 수 없는 하나의 천품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대상처럼 과학적으로 따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개의 작은 솔씨에서도 정정한 소나무를 생각할 수 있고 한낱 까만 꽃씨 속에서도 능히 그 아담한 꽃이파리와 더불어 진한 향기와 벌나비까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의 세계에서만 허용되는 것일 것이다. 꽃씨 속에는 파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빨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노란 나비 떼가 숨어있다. 그러기에 꾀꼬리는 까마귀가 될 수 없고 까마귀는 꾀꼬리가 될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은 천부적으로 꾀꼬리는 꾀꼬리의, 까마귀는 까마귀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인 것이다.
타고난 천품·소질이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소질이란 결국 남다른 경험을 남이 못하는 때와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고 어떻게 감각했느냐에 의해서 시 예술은 창조될 것이다. 시 예술은 표현임에 틀림없다. 나아가서 행위의 실재일 것이다.
당신은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있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내용 편중주의자들의 잠꼬대가 아니면 그것들이 남기고 간 한 개의 고적古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찌 내용-소재가 표현일 수야 있겠는가? 내용-소재는 어디까지나 내용-소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기에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야만 시 예술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소재만의 시인이 있다. 모두 시인으로서 미완성품임에 틀림없다. 시의 노력은 한 개의 표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천사만려해보아야 천품 있는 시인들에 의해서만 영원히 계승되리라 생각된다. 시의 해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시인들이 모여 있다. 어떤 시인은 그 해안에서 산책하는 것쯤으로 만족하고 어떤 시인은 시의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서 몹시 몸부림치고 또 어떤 시인은 그 바다에 들어갈 것을 아주 단념하고 헛되이 (확실히 헛되이) 해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지만 용감한 정열을 지닌 일군一群의 시인들은 이미 그 바다에 들어갔고 그 바다에서 마음껏 호흡함과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희열을 느끼고 있다. 이 시의 바다란 결국 인간의 바다로 통하는 길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인생의 꾀꼬리에 속하는 족속들임에 틀림없다.
흔히 시인을 가리켜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한다. 그만큼 언어는 시인에게 있어서 생명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 언어를 선택하는 힘, 언어를 자유분방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시인만이 천분 있는 시인일 것이다.
일상 우리들이 회화에서 무의식중에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하나에서도 정연한 건축 양식에서 볼 수 있는 입체감을 느낀다면, 그 원자의 한 개만 상실해도 생명 있는 언어의 성립을 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가 지닌 특이한 향기와 더불어 그 언어의 살과 피를 파악할 수 있는, 곧 언어의 생명감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점정點睛을 못한 화룡畫龍에 불과하다. 생명감이 결여된 언어의 나열은 그 시의 귀중한 정서를 독자의 가슴에 아예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흔히 두뇌의 시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위대한 건축이라고 말하는 소이가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그 누구를 위하여 시를 쓴다고 명확히 대답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는가.
일찍이 발레리는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도 발레리처럼 당신 자신을 위하여 써도 좋다. 또는 당신 같은 독자를 열이고 천이고 만이고 상대로 해서 써도 좋다. 그 실 발레리의 ‘내 자신’이란 결국 발레리 같은 독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이 언제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또한 인간을 위해서 그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예술도 인간사회의 요구에서 오는 것이다. 요구 없는 곳에 예술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사소한 것 같은 일이지만 우리들은 석양에 저 하늘 높이 날아가는 까마귀를 볼 때 그 수효는 헤아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기르는 닭이나 양을 아주 정밀하게 계산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자의 수효는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전자의 수효는 하등 필요나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면 한 시인의 작품이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닭이나 양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만리성萬里城
밤마다 밤마다
온 하룻 밤
쌓았다 헐었다
긴 만리성
- <소월>
한 작품이 인간에게 있어서 닭이나 양의 역할을 한다고 해서 이것을 어떤 실리나 공리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경계한다. 이 실리나 공리는 항상 인간의 정신세계에 있어서 가져오는 희열과 구원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가 뒷날 어떠한 딴 양상을 초래하고 노정하건 그러한 실리나 공리는 우리 정서나 애정을 논의하는 서정 세계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서정 정신세계를 가장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존귀하고 위대한 것은 오직 애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애愛의 세계에서만 인간은 순화되고 고양될 수 있는 것이다.
만리성萬里城은 소월素月만이 읊조리는 서정의 세계는 아니다. 아기자기한 우리 인간의 정한은 영원히 만리성을 쌓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지저분한 지구에서 인간은 과연 몇 억만이나 삶을 영위해 왔는지 그것은 고고학자에게 맡길 일이다. 진실하고 참하게, 아니 좀더 아름답게 살아 보자는 것이 인간의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오늘까지 겪어온 모든 투쟁이라거나 역사란 것도 결국은 그 참상의 의의가 그러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여도 독단은 아닐 것이다. 그러자면 거기에 자연 윤리니 도덕이니 종교니 또는 철학이니 하는 따위의 가장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그것의 연장이 정치·경제·과학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시란 일부 고답이니 순수니 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것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가 할 때 그것은 아니다. 왜? 윤리·도덕·철학·종교 내지 정치·경제라는 배양토에 깊이 뿌리박고 발아하고 성장해야 좋은 개화와 결실을 약속할 수 있는 식물-草本이건 木本이건-임에 틀림없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이 배양토는 한가하고 비옥해야 된다는 것은 일찍이 문화사가 증명해 준 것이며 일제가 우리 민족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문학예술을 말살하기 전에 먼저 우리 국어사용을 금지한 것은 일거양득의 가장 악한 정책으로써 국어 말살에서 우리 문학의 자연 소멸을 꾀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 민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한 언어의 성장과정은 그대로 그 민족의 역사일 것이며 그 언어가 제 민족을 떠난다는 것은 언어의 상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 자체가 다른 어족에 동화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배양토가 확보되지 않는 한 우리 독특한 사상과 감정을 무엇으로써 정할 수 있겠는가. 꾀꼬리에게 까마귀의 노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한때 우리의 시단의 모더니스트 편석촌은 그가 청춘시절에 우리들의 시를 청중 없는 음악회라고 흔히 써오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이 20여 년 전 일인데 이제도 역시 우리들의 시는 청중 없는 음악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어찌하는가? 아직도 시는 우리들의 생활필수품 목록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요원한 시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 생활에 있어 의식주와 자동차와 일상생활 필수품도 필요하지만 인간의 아름다운 의식의 내용과 형식에서 빚어 나오는 표현인 시 예술도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 누가 케케묵은 질문이긴 하지만 누구를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나와 같은 독자와 더불어 시에 살고 싶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대답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
실상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된 행동의 일단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란 인간과 예술이 제각기 딴 영역에서 인간 생활의 진의는 오랜 시간을 두고 몰락했다고 당신은 생각해 본 일이 없는가? 인간생활의 참된 의의를 시 예술과 생활을 분리할 수 없는 경지에서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절망된 세계의 주민이거나 정상성을 잃은 사고에서 오는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인간일 것이다.
언제나 미래에 살고 또 살려고 하는 당신들 시인의 불타는 청춘이 자기의 아름다운 의식의 건설을 위하여 노동을 한다는 것은 당신들 생활의 일과 중에서 무엇보다도 성스럽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당신들이 생명을 보존하는데 있어 정신으로는 물론 생래적生來的으로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지고지순한 정서를 서叙한다는 것은 골고다의 언덕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쓰러진 저 예수의 세계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이요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그의 뜨거운 정열을 작열시킨 가장 위대한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소월의 「산유화」가 「초혼」으로 결정되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인이란 이렇게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위한 선택된 가장 우수한 선수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마치 선철을 용해시킬 때 기사가 필요하듯이 인간의 찬란한 정신 또한 당신들 시인이 기사 이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불안으로 당신들 의상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도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원 전 700년, 희랍 시대에서 칠현금에 맞추어 노래불리어졌다는 서정시의 강물은 오늘도 여전히 은은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라. 이 강물에 뛰어들어갈 때면 우리는 테이블과 머리를 마주대고 앉아 인스피레이션을 쥐어짜지 않아도 그 강물에서 목욕하는 뮤즈를 용이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와 문화애서 항상 선구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이 행렬에서 뒤떨어져서는 시인이 아닐 것이며 영원한 시대의 진실한 노래의 연락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의 시인은 먼저 기사작법에 있어서의 기술인적 기교가 아니라 시의 영원한 고향인 시인의 생활 태도를 이름이니, 시인이 발견한 미는 곧 진실이기 때문에 시는 모든 예술의 원천인 동시에 출발이요 또한 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