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와 운율
음률은 율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절주를 말하며 시가에 있어서는 운율로 불리어진다. 원시시대의 문화는 먼저 무용과 음악의 음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시가는 그들 가곡과 무용과 더불어 삼위일체였으나 시가 무용과 음악에서 독립하여 문학의 장르로서 발전한 뒤에도 운율형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이들 무용과 음악과의 혈연관계에 기인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이거니와, 시가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호소하는 주관적 태도의 문학이라면 산문(주로 소설)은 대상을 냉정히 관찰하여 묘사하고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객관적 태도의 문학으로 그 본질상에 있어 소설 등 산문문학은 참됨(진眞)을 이데아로 하는 지성의 문학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반하여 주관적 정서와 감정을 서술하는 시문학은 아름다움(미美)을 이데아로 하는 감성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주관적 태도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이 주관적이란 것은 어떠한 독단이나 상식적인 범주의 세계가 아님은 물론 항상 보편타당성과 바른 비판성에 뿌리박은 것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언어의 미는 주로 성조의 억양과 절주節奏에 있는 것으로 문장에서도 사람에게 쾌감을 부여하게 되는 것은 언어의 유동하는 음악성에 있으니 사람이 어떠한 시적감흥을 마음속에 일으킬 때에는 스스로 언어에 일종의 음악적인 억양과 절주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어딘지 모르게 거기에는 리드미컬한 표현형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시가 음악에서 독립하여 순수 문학으로서 발전했을 때에도 오히려 그 자신 음악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음악이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서로 유기적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이미 기원전 700년에 저 그리스 시대에 현금에 맞추어 서정시가 노래 불려졌다는 데서도 알 수 있는 것으로 오늘에 있어서도 일반 가요가 음악을 떠나서는 자립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노래 불리어지는 가요( 속요, 유행가를 막론하고)가 음악에서 이탈해서는 그 존재가치조차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시와 음악이 각자 별개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그 관련성을 갖게 되는 것은 시 자체가 음악적인 성조의 억양과 절주가 있는 까닭이다. 운율을 주로 하는 외국 시의 평측 압운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시조를 비롯한 7·5조, 4·4조의 이 모든 정형시에서 우리는 시의 구성이 음악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너무나 역력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음악의 멜로디를 구성하는 음의 고저·장단과 강약 및 음색에서 오는 청각미에 반하여 시의 음률에서는 이러한 청각미와 더불어 내용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가 가지고 있는 음악성은 청각에서 오는 미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지닌 독특한 향기와 이미지에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종래에 가장 음악성을 존중해 오고 있는 정형시에 대한 문제이다. 한때 압운을 주장하던 안서와 더불어 전통적인 음율 형태를 주장하는 시조시인들 (실상은 현대시조는 서정시에 접근하고 있으며 종래의 시형을 파격하지만)의 견해이다. 이 1연 3장의 정형시인 시조를 쓰는 시인은 자기의 사상 감정을 일정한 음률의 틀 안에 몰아넣은 데 불과하다. 자유시는 자기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고의 논리와 감정 내지 감각을 상징하는 자유분방한 운율 형태를 가진 데 반하여 정형시는 고정된 운율 형태의 틀 속에 자기의 사상 감정을 부자연하게도 집어넣게 되는 제약을 받는다.
정형시가 운율형태-음조의 구속을 받는 반면에 자유시는 운율형태를 자유롭게 이끌고 나가므로 사상 감정 또한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시가 지닌 일종의 음악적 절주는 ‘부정율의 격조’ 혹은 내재율로 불리어진다. 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나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도 역시 작품을 저류하는 일종의 음악적 절주성이 있는 언어로 씌어진 부정율의 격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시가 자기의 사상 감정을 율동적 운문으로 표현한 문학의 장르인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자유시는 음악적 절주성 있는 언어로 씌어진 운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란 무엇일까?’ 하는 문제는 ‘예술은 무엇일까?’ 또는 ‘인생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로 통하느니만치 그 정의 또한 해답을 얻기에는 용이한 것이 아니다.
일찍이 괴테는 ‘시에 대하여 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막론하고 야만인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워즈워스는 ‘시는 모든 지식의 처음이요 끝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처럼 불멸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시는 모든 예술의 출발이요 동시에 귀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시는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될 수 있고 여기서 샘솟아나는 에스프리(정신)가 여러 갈래 시내로 흘러가서는 그 표현방법의 차이에서 또 여러 가지 장르의 예술이 분화되는 것이다. 회화도 음악도 연극도 영화도 이 강물 지류에 불과한 것이다.
요컨대 예술의 정신은 바로 시의 정신이기 때문에 시 작품을 쓰고 안 쓰고 하는 것은 별 문제로 예술가는 먼저 시인-시정신의 소유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뮤즈는 항상 시의 샘물에서만 목욕하기 때문에.
3. 시와 언어
언어는 공동생활의 필요에서 발생되었으며 공동생활 속에서 육성 발전되었다. 인간이 혼자 생존하는 데는 의식주로 족했을 것이나 한 사람 이상이 모여 생활을 경영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방법으로 먼저 언어가 필요했을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그 어느 민족에 있어서도 자연발생적인 정신문화의 첫 과목으로 아무리 미개한 민족도 민족 특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의식주 등 물질적인 면에서는 타민족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도 언어는 일조일석에 외국화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민족과 더불어 그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다.
한 언어의 생장과정은 그대로 그 민족의 역사일 것이며 그 언어가 제 민족을 떠난다는 것은 언어의 상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 자체가 다른 어족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토漢土 사백여 주四百餘州를 지배한 만주족이 정치적으로는 한족을 정복했으나 종내에는 그들의 언어문학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문화에 유입되어 그대로 한족에 동화된 것은 좋은 일례로 한 민족의 문화적 실력은 정치적 실력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는 능히 알 수 있다. 8·15 전에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국어 말살을 기도하여 일어 사용을 강요한 것도 우리 민족을 성격적으로 파산시키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분서갱유로 일세를 억압하던 진시황도 천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폭군의 대명사로 남아 있고, 언문(한글)의 사용을 금지하던 조선조 연산군도 또한 광군狂君의 비방을 받고 있는 것은 이같이 어떠한 정치적 무력이나 폭력에 의해서는 언어나 문자를 말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 주는 좋은 교훈일 것이다. 일제의 강압정책에도 우리 민족이 그들에게 동화되지 않고 8·15를 경계로 우리 언어와 더불어 문화의 전반적인 면에서 민족적 면목을 분연히 찾아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언어와 민족 문화가 전통적으로 일본의 그것에 비하여 우수한 까닭인 것을 알 수 있다.
언어는 문학 이전에 존재한 것으로 문학이 없는 미개민족에게도 언어는 있을 수 있으나, 언어가 없이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어가 없는 곳에 한국 문학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문학사를 보면 우리 문학은 한문에서 발아하고 성장해 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문학일 수 없는 것이다. 구태여 규정짓는다면 한국문학 내의 한문문학에 불과한 것이다. 폴란드 사람인 콘래드는 그 문학을 영어로 썼기 때문에 폴란드 문학이 아닌 영문학이었고, 인도 시인 타골 또한 영어로 쓴 시는 인도문학이라기보다는 영문학일 것이니, 한시를 쓴 김삿갓(김립)의 문학도 순수한 우리 문학이 아니고 우리 문학 내의 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언제나 문학의 국적은 그 민족의 언어에 종속된다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문학을 금하기 전에 먼저 우리 국어를 금한 것은 일거양득의 가장 악랄한 정책으로서 국어말살에서 우리 문학의 자연 소멸을 꾀했던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 당시 몇몇 작가가 일제의 유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국어를 버리고 일어로 작품행동을 감행했으니 그것은 한 작가로서의 모국어에 대한 잔인성의 폭로인 동시에 예술적 양심의 결핍을 여실히 폭로한 것으로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린 것은 그대로 우리 문화와 민족을 부정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나라를 빼앗기면서 그대로 유지되었던 우리 국어는 일제에 짓밟혀 민족의 체모와 더불어 일로 상실 저하되는 비극을 자아내는 데 이들 일부 작가 시인이 참여 가편하였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라느니보다 슬픈 일이었다.
우리 문학의 첫 걸음은 적어도 2천 년 전 삼국시대 초기부터 기산할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이 문화 기록은 불행하게도 우리 언어로서의 기록이 아닌 한문으로 표현되었으니, 언어는 지껄이는 데 불과하며 오랜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왔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와 더불어 용비어천가가 비로소 한글로 나오고 유불전적이 번역되었으나 오랜 동안 파란곡절을 겪어 오다가 겨우 민족의 자각을 얻을 무렵에는 벌써 우리 국어는 비참하게도 국어로서의 지위를 일어에 빼앗겼던 것은 서상한 바 있거니와 오늘날 우리가 우리 국어로 시문학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사상 감정을 구애됨이 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더 큰 것이다.
더구나 우리말은 어음의 방사선적 무한성과 어의의 예리한 감각성을 지녀 시문학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작용하는 이상적 언어이다. 이런 우수한 언어를 가진 기쁨은 누구보다도 언어를 생명으로 하는 시인들이 가장 크리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이양하는 지용의 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말은 이런 시인의 손에 붙잡힐 때 비로소 프랑스 말같이 아름다운 음향과 너그러운 여운을 갖고 나타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양하가 말한 바는 물론 우리 언어가 전반적으로 아름다운 음향과 너그러운 여운을 가졌다는 것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정지용 같은 시인의 시에 의해서 비로소 그런 음향미의 운율을 낼 수 있다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풀 발레리는 시를 가리켜 말의 축제라는 말을 썼다. 어찌 생각하면 시는 말의 음악일 수도 있고 말의 무용일 수도 있고 말의 회화일 수도 있다. 시의 초창기에 그것은 무용과 음악과 삼위일체였던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할 필요도 없거니와 입으로 전해지던 언어가 문자로 씌어질 때 표의문학(상형문자)에는 회화성만 있고 표음문학에는 음악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에는 회화성과 음악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성(음향)을 가청적이라고 하는 데 반하여 회화성(모양)은 가시적이라고 불리어진다. 전자를 시간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공간적 표현인 것이다.
언어가 말해지는 말(음성언어)에 그치지 않고 씌어지는 말(문자언어)로 발전하여 개개의 말과 그 결합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하여 시적효과가 발생되는 것으로, 시에서의 언어의 용법은 어의의 개념적 의미(가상적)에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고 더욱 넓은 연상과 이미지(심상)를 독자에게 부여하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시인은 어떠한 말을 선택해서 써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생명체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늘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미 고어사전이라는 분묘에 묻혀 있는 죽은 말은 우리들의 성장하면서 살아 있는 사상과 감정의 의상이 아니다. 시에 씌어지는 말이 산 말이 아니고서야 어찌 살아있는 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언어는 언제나 시대와 같이 살고 또 시대와 같이 성장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시인은 언어에 민감할 것을 요구할 뿐 아니라 시대와 문화의 선구자일 것을 요구한다. 이 행렬에서 떨어질 때 그것은 벌써 폐업한 시인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고어를 살리려고 노력한 시인으로 우리는 윤곤강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살어리'와 '피리'가 고어를 살린 공로도 없지 않으나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은 이들 시집에 「청산별곡」을 앞설 작품이 없다는 것으로도 넉넉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별곡」을 우리 문화유산으로 받아들여서 우리가 소화하여 능히 우리들의 뼈와 살이 되면 그만이다. 그의 '살어리'와 '피리' 는 이런 점에서 확실히 소화불량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고 규정짓게 되는 의의가 여기 있다. 현대시인의 작품을 우리는 고어사전을 펼쳐가면서 이해해야 한다는 이유가 어디 있을 것인가 말이다.
결국 언어가 인간생활의 영위에 있어 창조되고 성장되는 시대적 필연성을 지닌 점을 긍정한다면 시인은 누구보다도 언어의 새로운 발견과 창조의 명예로운 역군으로서 전진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지난 시대와 더불어 허물어지고 자취를 감춘 고어의 부활을 꾀하는 것은 우리가 봉건주의의 향수를 느끼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의 생명력과 고어의 생명력을 혼동하는 것을 나는 여기서 경계하여 둔다.
여기서 잠시 방언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어와 달리 어느 지방적인 특수한 표현을 요할 때에는 불가결의 수단으로 소설문학에서는 더구나 절실한 것이지만 시문학에서도 또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소설문학에서 전라도 방언을 가장 아름답게 구사한 채만식을 우리는 잊을 수 없듯이 서정주의 전라도방언과 백석의 관서방언은 그대로 커다란 개척으로 그 소박미는 잊을 수 없는 공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어는 그렇게 궁벽한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시어는 서로 주고받는 우리들의 일상회화에서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고 또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우수한 시인에게 그 어휘가 붙잡힐 때 그것은 음악적 회화적 또 무용적인 시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완전하게 시로 창조하고 전달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데 우리가 경계할 것은 시가 언어의 수인囚人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언어는 언제나 우리들의 사상과 감정-정신의 가장 자유롭고 가장 편리한 주택이어야지 거기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만일 언어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그것은 내용-사상을 무시하고 형식주의-기교의 위험한 지대에 떨어질 염려가 있다. 언어가 사상 감정의 그릇과 의상과 주택의 역할을 벗어나게 되면 이는 시의 자살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사상 감정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내용편중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한때 박회월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고 한 말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용과 기교의 혼연한 통일은 일반 예술에서 다같이 요청되는 것이지만 시문학에 있어서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조화미의 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장중하고 우아하고 또는 소박한 시의 내용 -사상일지라도 거기에 따르는 시어와 기교의 균형을 얻지 못할 때에는 기도한 장중성과 우아성과 소박성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시의 조화미는 그 내용에 알맞은 형식과 더불어 선택된 유일한 시어가 그 생명을 좌우할 것이다.
일찍이 투르게네프가 그의 산문시집에서 모국어에 대하여 그 위대성을 찬양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그가 임종시에 러시아 문학자에게 남긴 유언의 한 마디로 ‘원컨대 우리들의 고귀한 유산인 러시아 말을 순수히 지켜 달라.’고 외친 것은 그가 얼마나 모국어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말하였는가 우리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와 시어의 문제에 있어서 예술창작은 몇몇 선발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투철하게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예술적 언어의 온갖 요소는 누구나 일상 쓰고 있는 용어 속에 있는 것이므로 이 요소를 발전시키고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작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서보다도 예술적인 언어의 수단을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것을 누군가 말한 바 있다. 결국 시는 언어로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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