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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3-30 10:12
나의 어린 시절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921  
 
1. 어린 시절의 설
나는 가난한 시골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딸 다섯을 줄곧 낳으신 뒤 마흔이 가까워서야 아들을 얻었으니 그때만 해도 만득이라고 했다. 20안 자식이요 30안 재물이라고 해서 스물 안에 아들을 얻어야 하고 서른 안에 재산을 장만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시절엔 거의 통례처럼 여겨왔던 탓이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에도 어리광 한 번 제대로 부려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어찌나 엄하셨는지 차라리 아버지를 따르는 편이었으나 아버지 역시 다정다감하면서도 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채倭債(일본사람의 빚)에 쫓기게 되어 여러 대 눌러 살아오던 집을 몰래 나온 것은 내가 네 살 나던 해였다고 뒤에 들어 안 이야기다. 지금도 기억에 역력히 떠오르는 것은 우리 집 문에 가릿장을 대고 못을 다지던 빚쟁이 일본사람의 그 무서운 얼굴이다.
이듬해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계화도에 자리 잡고 삼천 제자를 거느린 성리학의 대학자 간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하시게 되고, 외갓집에 의지하고 살던 우리 식구는 말째 아버지를 찾아 읍내 부안에서 십 리 밖에 떨어져 있는 창두라는 해촌海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여섯 살 나던 해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마을 뒤뜰에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원두막 옆을 지나노라니 아버지 친구 분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원두막에 들르자 그 분이 참외 몇 개를 칡덩굴에 꿰 주시기에 신바람이 나서 무거운데도 가까스로 어깨에 들여 메고 집 문 앞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어머니를 불러재꼈다.
문을 열고 나오시며 나를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반가워하시기는커녕 노여움에 질린 굳은 표정인 데 나는 놀랐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는 참외를 받아 놓으시더니 불문곡직하고 매를 해가지고 오라는 추상같은 호령을 내렸다.
“이놈아 네가 원두막 옆에서 얼마나 근천을 떨었기에 이걸 얻어가지고 왔느냐.” 는 것이었다. 나의 변명이 용납될 리 없었다. 모래에 혀를 박고 죽을지언정 먹을 것과 먹어선 안 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 어머님의 대쪽 같은 교훈이었다.  아버지의 낭만적인 그 다정다감한 성격에서 내 시의 싹이 텄다면 냉철한 어머니의 성격에서 작은 대로 지조를 생명으로 삼고 살아야겠다는 싹이 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추석명절이나 설이 아니면 좀체 집에 오시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설빔을 차리기란 엄두도 낼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자랐기에 잘하면 바랜 광목바지 저고리를 얻어 입는 게 고작이요 미투리나 꽃나막신을 얻어 신으면 다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명주나 비단 같은 것은 이름난 부잣집에서나 입었고 인조견도 없었을 뿐더러 고무신마저 없는 때라 짚신 아니면 나막신을 신어야 했고 가죽신은 부잣집 도련님이나 신는 판이었다.
어느 해 설이었던가 말째 아버지가 읍내 시장에서 설빔으로 신발을 사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말째 아버지의 아들 신은 미투리를 사왔는데 내 신은 짚신을 사온 것을 보고 어찌나 언짢고 섭섭했는지 펑펑 운 일이 있다. 그때 말째 아버지한테서 당한 일이 뼈에 맺혔던지 애들에게 선물을 안 하면 몰라도 선물에 그런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는 좋은 교훈을 얻었다면 지나친 억설일는지….
내가 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전간재 선생에게 매달리시던 아버지도 집으로 돌아오시고 살림도 보살피게 되어 형편은 좀 풀리게 되었다. 그때에는 시장에 처음으로 인조견이라는 새 비단도 나돌게 되어 설이 닥치면 제법 빛깔도 맞추어 위아래 매기에 두루마기까지 얻어 입게 되었다. 그 무렵에 처음으로 조끼라는 소매 없는 저고린데도 호주머니가 네 개씩이나 붙은 옷이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종래에는 저고리 겉섶 안에 호주머니를 붙여서 너절한 소지품을 지니고 다니던 때라 새로 나온 조끼가 어찌나 입고 싶었던지 시장을 지날 때마다 가게에 걸려 있는 조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도 여섯 살 때 참외사건이 문득 떠올라 못 볼 것이나 본 듯 지나치곤 했다. 보통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머리꼬리를 잘라내고 보니 가뜬한 맵시에 조끼가 꼭 한번 입고 싶어 겨우 겨우 어머니를 졸라서 그해 섣달 그믐날 시장에 따라가서 조끼 하나를 골라 샀다. 그때 처음 입은 것이 수박색 조끼였다. 분홍색 인조견 두루마기까지 곁들여 입고 아버지를 따라 세뱃길에 나서고 보니 금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타는 얼음처럼 매서우신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세배 길에 나서는 우리 형제를 바라보시는 것이 퍽은 대견스러웠던지 좀체 헤픈 웃음을 보이지 않으시는 당신도 마루에서 빙그레 웃으시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히 떠오르지만 벌써 50년도 더 되는 옛날의 일이다.
이 마을에서 3년을 지낸 뒤 간재 문하에서 공부하시던 아버지가 다시 살림을 보살피게 되어 말째 아버지의 옆에 붙어살던 우리는 고개 넘어 ‘금산리’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고 우리 형제도 서당에 앉아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보통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해 오월에 어느 하급생이 수업료를 못낸 벌로 담임선생은 그 학생을 꾀벗긴 다음 양울타리 철조망 밖으로 몰아내고 다시 그 울타리 구멍으로 개처럼 기어오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을 6학년생이 선두에 나서서 5백 명 가까운 전교학생이 함께 동맹휴학으로 들어가 일 주일 동안 학교를 비워놓고 산으로 나가던 덕분에 나는 무기정학을 당하게 되고 그 선생은 어느 타관학교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 이듬해 졸업을 앞둔 3월에야 무기정학은 풀렸으나 등교한 일은 없고 졸업장이 어느 인편에 왔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후련한 추억의 한 토막이다.

2. 다뉴브 강의 잔물결
그것은 꿈 많던 소년 시절의 일이었으니, 생각하면 까마득한 40여 년 전의 옛날이다. 그때 나에겐 바이올린을 가르쳐 주던 다정다감한 사촌동생 추엽秋葉 군이 있었고, 노래를 가르쳐 주던 먼 아저씨뻘의 추수秋水라는 소년이 있었다.
내 고향 부안은 예부터 여류 시인 매창梅窓과 변산이 있어 이름난 고장으로 뒷산에 오르면 서해 바다가 손에 잡힐 듯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해질 무렵이면 노을에 비낀 잔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수평선을 향하여 내 소년의 꿈은 마냥 부풀어 오르기만 했던 것이다.
마삭줄이 칭칭 감긴 바위에 걸터앉아 우리들 소년은 수평선을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밤이 올 때까지 무작정 바이올린을 켜는가 하면 가슴이 후련하도록 소리 높이 노래를 부르면서 꿈 많던 소년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때에 부르던 노래가 바로��다뉴브 강의 잔물결��이었다.

저녁노을은 달빛을 가리고
도화 강변에 나부껴 있는 곳
어기여차 배를 저어
달그림자 깨치면서
은파 연월 일엽편주 둥실 떠나간다.

고요한 밤 달빛에 어리어
도나우 강변에 꽃잎은 춤춘다.
강물 속에 달그림자
바람결에 흔들리고
저 멀리서 피리소리 들려오도다.

너무도 오랜 옛날에 부르던 노래여서 다시 되새겨 적다 보니 가사가 어딘지 모르게 맞지 않는 것만 같다. 이 곡이 루마니아에서 군악대장을 지내며 왈츠를 숱하게 작곡한 이바노비치의 것이라는 것은 그 얼마 뒤에 알게 된 일이다.
지금도 문득 이 멜로디가 버릇처럼 떠오르면 구름 묻혀 있는 아득한 고향이 불현듯 눈앞에 어리고 뒷산에서 바라보던 노을 비낀 수평선의 은파가 눈에 선하다.
바이올린을 잘도 켜던 그 다정다감한 사촌 추엽은 가을 잎 휘날리듯 요절한 지 이미 오래요, 해방 뒤까지 사귀어 오던 추수 또한 야윈 가을 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새삼 가슴 아픈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면사포를 쓴 이른 봄 달밤에 이슥하도록 이 노래를 나와 같이 부르던 소녀의 슬픈 소식을 바람결에 들은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오랜 이야기다.
몇 번이고 거센 역사의 물결에 할퀼 대로 할퀴고 난 지금도 나는 고향의 바다를 생각하며 이미 떠나버린 옛 친구와 더불어 그 소녀의 뜨거운 손길을 느껴 보지만 정맥이 무참히 두드러진 내 손을 바라볼 때마다 의수義手 같은 착각을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소년도 가고 꿈도 가고 못다 부른 노래의 가느다란 한 줄기 가락이 쓰디쓴 입가에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