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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06 15:46
지록위마指鹿爲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342  
 
지록위마指鹿爲馬

1.
한때 지록위마로 처세의 제일과 제일장을 삼던 무리가 있었다. 자신의 영달과 안일을 위해서 그것을 처세술의 유일한 금과옥조로 삼는 것을 구태여 시비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사슴을 사슴이라고 바른 말 하는 사람에게 해가 돌아오니 문제는 달라진다.
지록위마의 고사는 멀리 진시황 때에 비롯한 이야기로 전해 오니 2천 년이 훨씬 넘는가 보다. 하기야 분서갱유로 수선을 피우던 때이고 보니 지록위마쯤의 아첨은 있음직도 한 일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일진대 그것을 똑바로 말하는 데 인간의 인간다운 격이 있고 그 격이 바로 지조로 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말을 재음미할 것도 없이 이 위대한 천계天界의 콜럼버스가 없었던들 우리 인류문화는 그 얼마나 전진이 늦었을 것인가 상도할 때 진리란 언젠가는 햇빛을 불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아니 느낄 수 없다.
과연 종교 재판으로 회전하는 지구를 정지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무지는 무서운 죄를 범하기 마련이다. 갈릴레이를 재판정에 끌고 나온 것도 무지가 저지른 범죄임에 틀림없다. 인간이 고귀하지만 지록위마의 아첨과 무지에 빠질 때 그보다 무서운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칸트가 종교 비판을 한 죄(?)로 함구령이란 재갈을 입에 물어야 했으니 이 또한 무지가 빚어낸 비극이 아니고 무엇일까? 무지는 잡초와 같은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한 포기의 꽃을 가꾸는 데도 잡초를 뽑아내야 개화와 결과를 약속할 수 있거늘 인간 잡초가 무성한 곳에 어찌 진실하고 아름다운 인간 생활의 영위를 약속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세상이야 어찌 되건 지록위마로 자신의 영달과 안일만을 꿈꾸는 무뢰한이 있는 한 인간 사회의 정화는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록위마여 ! 안녕.

2.
장자莊子 소요유펀逍遙遊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요 임금이 허유許由를 찾아가 말하기를 “그대가 천하를 맡아 다스린다면 잘 다스릴 것인데 내가 천하를 맡아 있으니 내 스스로 보아 만족하지 못하오. 원컨대 이 천하를 그대에게 바치겠소.” 한즉 허유가 대답하기를 “그대가 천하를 다스려 이미 잘 통치되어 있거늘, 내가 그대를 대신한다면 나는 명예를 위하라는 말이오? 명예는 실재의 그림자인데 어찌 그림자를 위하여 내 몸을 괴롭히겠소. 뱁새가 깊은 숲에 깃들여도 나무 가지 하나를 차지함에 지나지 않고, 새앙쥐가 강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 임금이여 그만 돌아가시오. 나는 천하를 가져 쓸 데가 없소.” 이렇게 끝내 거절한 허유는 강가에 나아가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들어 더럽혀진 자기의 귀를 강물에 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허화와 명리에 허덕이고 권력에 굶주린 자들에게는 약이 될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을지 모르지만 허유의 생활 철학이 극히 소극적인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저 데카르트처럼 인간을 숲에 서 있는 나무나 풀을 뜯는 짐승을 고찰하는 것과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짓는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은 나무 한 가지로 보금자리를 지어 만족할 수 있는 뱁새도 아니요 배를 채우는 물로써 만족할 수 있는 새앙쥐도 아니다.
한 포기의 풀이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철 따라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듯이 또는 한 마리의 새나 짐승처럼 나무 가지에 의지를 할 수 있다면 현재의 상태로 인간은 능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사유하는 동물이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고 동시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개인으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존하는 것이니 인간 생활의 원천인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개인과 사회와 자연의 삼위일체 속에서 설계하고 의욕하고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나 겪어야 할 미래의 역사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시간이란 자연사적 시간이 아니라 사회사적 시간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자연사적 시간을 정복하고 지배한 위에 설정한 사회사적 시간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아직까지 저 칸파넬라가 꿈꾸던 태양의 나라도 모어가 꿈꾸던 유토피아도, 도연명의 도원경도 아직 지구에 설정되기에는 요원한 사회적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거늘 이 절실한 현실을 외면하고 저 허유처럼 오불관언으로 한운야학閒雲野鶴을 벗 삼아 은둔할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스스로의 역량을 바탕으로 사회사적 시간 위에 도원경을 건설하는 데 참여하여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3.
9월 하늘이 드높다. 무료히 바라보는 뜨락에 벌써 갈대꽃이 무두룩이 올라오고 있다.
생각하는 갈대 ! <팡세>를 집필하던 파스칼도 무던히 무료했던 모양이다. 글쎄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였다는 말인가? 그 생각이란 것이 선과 악의 평행선을 줄곧 내달렸고 또 달리고 있기에 인간의 역사는 화려한 면보다는 슬픈 면의 기록이 더 많지 않을까? 갈대를 바라보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기에 가장 비자연적인 것도 인간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고향이란 자연과 비자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은 악마의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의 것이다.’ 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어제가 악마의 것이었던들 얼마나 우리는 행복한 오늘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역시 천사의 것은 아니고 보니 울다 지쳐 내일에 희망을 건 이 시인의 뜨거운, 아니 허전한 가슴을 족히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내일에 꿈을 걸고 살아가는 것은 어찌 한 시인에 그칠 것인가? 종교의 철학의, 나아가서는 정치의 꿈도 정녕 내일에 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꿈을 위해서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은 좀 더 선량한 생각을 하는 갈대가 되어야겠다. 그러므로 사람은 오래 사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값있게 사는 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끔 이것마저 망각하는 건망증 환자들이다. 그러기에 오래 살아보겠다는 집념보다는 값있게 살아야겠다는 신념이 더 중요하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의 비극은 이 신념을 망각하는 데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망각하는 갈대가 되면서부터 내일의 꿈을 먹고 사는 맥貘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사 천하가 다 흐리고 중인이 다 취할지언정 독청독성獨淸獨醒의 굴원의 심경마저 망각하는 갈대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요즘에도 양반을 들먹이는 상놈(?)이 있는가 하면 상놈을 들먹이는 양반(?)이 있다. 양자 다 오늘을 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상들이다. 소위 양반 칭호의 근원을 살펴보자면, 중국 <오대사五代史>에 문·무관을 동·서양반이라 일컬었고, <포은집圃隱集>에 ‘所謂眞兩班소위진양반 以其參東西兩班이기참동서양반曰兩之正職왈양지정직(이른바 참 양반은 동반과 서반에 든 이이니 즉 양반은 문무 관직 이름이다.) ’이라 하여 양반칭호의 출처를 밝히고 ‘忠孝又全曰兩충효우전왈양이요, 文質彬彬曰班문질빈빈왈반(충과 효를 더불어 갖추고 겉과 속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룬 이를 양반이라 한다.)’이라 양반의 자격을 지적했다. 이는 이로 미루어 옛날 중국의 사대부란 말과 같던 의미였는데 뒤에 관직의 유무에 상관없이 한 계급의 명칭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이 양반 계급의 횡포와 권세가 날로 높아가게 되자, 금은金銀 회뢰賄賂로 과관科官을 절취하고 심지어는 족보 협잡으로 반명班名을 도모하는 자 불소不少하였다니 소위 매관매직이 성행한 것도 모두 이에 연유한 것들이다.
이 폐단은 수수백년 뼛속까지 젖어들은 탓인지 이들 양반의 열자잔손劣子殘孫들은 아직도 노론·소론·남인·복인의 편색을 가르고 있으며 선조가 부리던 노자奴子로 하여금 뻔뻔스럽게 하정배下庭拜를 받는 예가 일부 지역에 건재하다니 요샛말로 사람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좀 오래 전 이야기지만 해방이 되자 깎았던 머리를 다시 길러 상투를 틀어 올리고 갑자기 팔자걸음으로 잃었던 양반을 다시 회수나 한 것처럼 으스대는 얼치기가 많았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이런 얼치기들을 자주 만나는 불행 속에 어울려 살게 되니 딱한 일이다.
혹자 단발을 권하거나 모자를 권하면 행세하는 집안에서 단발이 될 말이며 머리에 사포를 얹고 다니다니 될 말이냐는 데 아연실색의 정도가 아니다. 갓을 쓰고 사이드카를 타든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의 장도에 오르든 막을 재간은 없는 일이지만 이런 양반적 민주주의 사상이 식자층에도 도사리고 있으니 걱정이다.
민주주의를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인텔리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틀어 올린 상투를 잘라내지 않는 한 이 나라 민주주주의의 올바른 성장은 기대하기 지난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