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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9-06 15:22
지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608  
 
지조

1. 지조
세상에는 배신으로 영화를 누리고, 신의를 지키는 데서 불행을 초래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성삼문 같은 분은 배신을 못했기에 담금질을 당하고 그대로 목숨을 거두었지만 신숙주는 배신을 잘했기에 누대를 두고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성삼문은 우리들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지만 신숙주를 가슴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숙주의 부인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 뱉은 침으로 하여금 썩어 빠진 정신에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자는 데에 그 침의 의의가 있고 위력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뚤어진 정신에 중상을 입힌 것이리라.
지조를 상실한 인간이란 정신에 중상을 입어도 남의 일처럼 시치밀 떼고 뻔뻔스럽게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닐까. 지조란 인격의 기둥임에 틀림없다. 기둥이 썩으면 집이 무너지듯 지조가 문드러지면 그 인격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흔히 괴테를 말할 때 사람들은 그의 문학적 업적만 보고 4대 시성이니 세계적 문호니 하고 떠들어댄다. 물론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요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이마르에 진공해온 나폴레옹에게 달려가서 송시訟詩를 봉정한 것을 사람들은 까마득히 잊고 산다.
아직도 우리나라 신문학 50년사에 <파우스트>같은 걸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파우스트>를 못 쓸지언정, 아니 4대 시성이 못 될지언정 원수의 말발굽 아래 송시를 써 올리는 주착을 부릴 수는 없지 않은가.
백마를 타고 달려오는 나폴레옹의 웅자(?)를 자기 서재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헤겔 또한 세계의 정신이라고 환호를 올렸다니 이 철학자 역시 괴테에 못지않은 주착이 아닐 수 없다. 학문과 지조를 겸비하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일까. 한때 일제 총독의 문학상을 받고 거드럭거리던 친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우남찬가雩南讚歌」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 모 시인은 ‘이박사의 귀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절창으로 당시 명성을 떨쳤으니, 지록위마指鹿爲馬도 이에 이르고 보면 포복절도의 극치를 넘어 광태가 아닐 수 없다.
삼단三端도 옳게 저지르면 역사에 남아 천추에 빛나지만 그것이 역 코스일 때에는 그에 앞설 난센스는 없을 것이다. 지조는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위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2. 학자와 지조
“왕은 귀하가 귀하의 철학을 남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중요한 기초적 설교의 대부분을 곡해하며 조홀시粗忽視하는 데 대하여 크게 불만을 느끼는 바이다. 오인吾人은 즉시 귀하의 정확한 변명을 구하며 아울러 귀하가 여사한 과실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아니 도리어 귀하는 귀하의 의무를 지켜 우리들의 국부國父의 의도가 더욱 더 많이 달성되기 위하여 귀하의 재능과 권위를 사용해 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만일 귀하가 계속하여 반항하는 경우에는 귀하는 귀하에 대한 불행한 처분을 반드시 예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은 1794년 10월 1일 프로이센 정부가 노철학자 칸트에게 내린 명령이라기보다 포악한 협박이요 준엄한 함구령이었다. 칸트의 종교철학에 관한 획기적인 저서 <단순한 이성의 범위 내에서의 종교>가 당시의 지배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자신의 기휘忌諱였던 만큼 정부의 당황도 컸거니와 당사자인 칸트에게도 중대한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칸트는 이와 같은 견책이 근거 없는 일이라고 변호하고 학자의 입장에서 발표할 권리를 극력 주장했으나 끝내 서약서로 침묵을 다짐했다. 연구는 해도 발표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편에는 구리거나 켕기는 일이 아니면 캄캄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어찌 칸트에게만 한하랴. 소피스트에게 몰린 소크라테스는 법정을 교실로 삼고 판관을 생도로 열심히 최후의 공개강의를 끝낸 뒤 조용히 죽음의 잔을 들었고, 갈릴레이는 그 무지막지한 승려들만의 재판관을 상대로 한 항변의 설명이 무용함을 알고 자설自說의 부인을 요구대로 선선히 승인하고 난 뒤,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그래도 지구는 돌 것…’이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거니와, 스피노자는 종교재판에 의해서 파문의 선고를 받고 유리전전하면서도 렌즈를 갈아 여천餘喘을 부지하면서 굴함이 없이 그 철학을 사수하였으니 저 유명한 <신학 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여 진리 전파의 사도로서 학자적 사명을 다하는가 하면, 이단으로 몰린 브루노는 화형에 처하려고 벼르고 있는 로마의 광장에서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더미 속에 몸을 던져 그 신념을 영원히 우리 인류의 정신사에 남겼다.
단군론이 일조일석에 동조동근론으로 둔갑을 하고, 하이데거의 「팔굉일우설八紘一宇說」과 결혼식을 올리는 이 땅의 일급 학자(?)들의 변절을 생각할 때 이들 철학자의 숭고한 지조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3. 서예와 지조
얼마 전에 평생의 숙원이던 추사秋史 친필을 몇 폭 구하게 되었다. 언젠가 시내에 들어가는 길에 엿장수 엿목판에 추사 친필의 목각판이 들어 있는 반야심경 강의를 발견하고 일금 10 원에 사가지고 와서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해 놓고 가끔 떠들어 보던 판에 추사 친필을 구하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도와는 천리나 먼 거리에 있는 내가 추사를 그토록 좋아하는 까닭은 중국의 석학 옹방강翁方綱이 경술문장經術文章이 해동 제일이라고 극찬을 했다거나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하여 그 전까지의 그릇됨을 시정한 금석학자로서의 유명한 일화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옹방강과 동기창董其昌의 서법을 따르다가 미불米芾과 소식蘇軾을 거쳐 끝내 추사체라는 필법을 정비한 그 천재적 독창성에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독창성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것은 추사의 강직 고고한 인격과 더불어 그 철학과 학문일 것이다. 당대 실학파의 선구로 여러 번 유배에 몰리면서도 끝내 꺾일 줄 모르는 지조와 고집은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과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서도에 추사체를 정립하여 그 당시 추사체를 따르지 않으면 행세할 수 없을 만큼 일세를 풍미했다고 한다.
매국노 이완용도 그 글씨만은 명필 측에 손꼽히고 있으나 추사에 비하면 부처님 옆에 서 있는 땡땡이중에도 미칠 바 아니고 보니 한낱 서장書匠에 불과하리라. 저 당나라 충신 안진경顔眞卿은 그 글씨와 같이 인생의 조형기구에 도통하였을 뿐 아니라 애국 충정에 불타는 달인이라고 전하거니와, 만년에 역도逆徒 이희열李希烈에게 몰려 참살을 당한 것을 예지하고 조용히 절박한 운명을 직시한 그 생활 태도의 미를 그의 행초서에서 역력히 엿볼 수 있다 하니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과연 이완용의 글씨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었을 것인가. 한위육조漢魏六朝의 비갈碑碣이 지니고 있는 심연 같은 미는 말할 것도 없고, 왕희지의 전아하고도 청화순수淸和醇粹한 천의무봉은 언감생심이지만 서툴러도 좋으니 굽힐 줄 모르고 살다 간 추사 같은 속기 없는 글씨 한 줄 남겨놓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서자심화書者心畵라 하는데 섣불리 붓을 들어 무아지경에 든다는 얌체들의 만용을 볼 때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지나친 망발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