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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30 16:12
정원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376  
 
정원 이야기


40평 남짓한 앞뜰에 그저 되는 대로 질서 없이 심어놓은 나무가 시누대·식나무·수수꽃다리·태산목·꽝꽝나무·북가시나무·칠영수·백목련·독일가문비·이팝나무·석류나무·치자·뽀뽀나무·동백·호랑가시·낙우송·산수유·국로·감나무·모란·청매·벽도·은행나무·후박·철쭉·박태기나무·개나리·서향·파리똥나무·죽도화 등 30여 종이 있고 이밖에 장미가 10여 종이고 보니 그 면적에 비하면 초만원인 셈이다. 이 나무들 사이에 수선화·백합·국화·파초 등 숙근초宿根草가 자리를 잡고, 콘크리트 항아리에는 백련이 있어 모두 제 철을 기다리고 있다.
봄에는 눈 뜨는 움을 타고 수액이 분주히 오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나에게 점지해준 것도 이 나무들이요, 뒤이어 피어나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는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점지해준 것도 모두 이 나무들이다.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속물이 되어 멍청대다가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고 남모를 회한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수 있는 것도 나무들의 청정무구한 얼굴을 대할 때인 것이다.
인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식물들이지만 식물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에 새삼 뜨거운 정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요즘 들리는 이야기를 믿자는 것은 아니지만 정원 하나 제대로 설계해서 꾸며내는 데 수천만 원을 투자해서 기화요초로 거의 작은 공원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라니 그런 걸판스런 정원에 비하면 이 40평이란 겨우 그 정원의 한 모서리에 불과한 아주 초라한 것이지만 그런대로 10여 년을 정들여 가꾼 것들이라, 어디 하나 내 손 안 간 데가 없어 대견스럽다.
본시 정원이란 자연 풍광의 축소판이어서 따지고 보면 한 평인들 정원이 못 되란 법도 없을 것이다. 한 평은 한 평으로서의 스페이스가 있다. 그 스페이스에 알맞은 한 그루 나무나 한 포기 꽃을 심어 무엇이 모자라겠느냐. 그 나무에 한 마리의 새가 찾아와 울고 갈 수 있고 한 마리의 벌 나비가 다녀갈 수 있다면 족할 것이다. 그 한 평의 정원에도 햇빛은 굽어 볼 것이요 하늬바람이 지나가는가 하면 마파람 따라 빗발도 건너갈 것이다.
이 축소판 공간 또한 우주의 일각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즈음 유행하는 정원이란 공간을 확대하는 것으로 자랑을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일종의 확대병으로 보아 무방할 것 같다.
현미경의 발명으로 근대 생물학은 하나의 혁명을 가져왔다. 이것은 생물의 구조를 렌즈를 통해서 확대한 데서 얻어진 것이다. 더구나 광학현미경의 확대에서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전자현미경까지 등장해서 그 마력은 생물학의 새로운 분야를 속속 개척하여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생물의 경우에 그치는 것이요 정원과는 먼 이야기다.
차라리 정원에 있어서는 자연을 축소하는 데서 그 자연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인가 생각된다. 아무리 금강산이 좋고 한라산이 좋아도 그것이 바로 우리 정원일 수는 없다. 인간계의 흥망성쇠와는 초연히 살아가는 저 자연의 교묘한 기구를 밑받침하고 있는 섭리를 체득하자면 자연의 축소에서 그 묘미를 얻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좀 딴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엄청난 석탄과 석유의 소비량이 증가되어 대기 중의 탄산가스 량의 축적이 확대되면 멀지 않아 이 지구의 기온이 높아져서 극지의 얼음이 녹아내려 세계의 대도시는 해면 아래로 수몰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생물학자도 있다. 아무리 대량의 탄산가스를 소비하고 생활하는 식물일지언정 이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려나 축소보다는 확대에서 오는 불행일 것만은 사실이다.
각설. 우수를 바라보는 날씨가 갑자기 풀리고 보니 태산목이며 호랑가시나무 이파리에 흐르는 햇볕이 유달리 자르르 반짝이기 시작한다. 선뜻 전지가위를 쥐고 나서서 장미 가지를 전지하다 보니 벌서 복수초가 땅을 뚫고서 고개를 들고 수선화도 병아리 주둥이 같은 노란 순이 올라오고 있는 데 놀랬다. 이대로 경칩을 보내고 춘분이 다가올 무렵이면 복수초도 샛노랗게 피어나고 산유수 꽃도 흐드러지게 필 것이요 백목련도 젖빛 꽃봉오리가 부끄럽도록 부풀어 오를 것이다. 뒤이어 호랑가시가 그 진한 향기로 꿀벌 떼를 불러올 것이요 태산목 꽃도 그 굳게 닫았던 꽃멍덕을 차츰 벗어 던지고 보면 이 초라한 정원도 제대로 수다를 부릴 것을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설렐 따름이다.
그러나 아무리 태산목 꽃이 연이어 석 달을 계속 피어나고 수수꽃다리가 바람결에 향기를 내뱉고 장미가 제 아무리 요염하도록 짙은 향기로 법석을 부릴지언정 내 마음은 저 시누대 숲을 찾아갈 것이니, 소소히 흔들리는 대바람소리와 햇볕이 대 이파리에 분수처럼 부서지는 5월 한낮도 좋으려니와 때로 지나가는 빗소리가 또한 저 파초에 듣는 빗소리에 비길 바 아니거늘, 조용한 겨울 황혼을 사부랑 눈이 밟고 지나는 소리는 그대로 나직이 흔들리는 거문고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에게 단 한 평의 뜰을 허락한다면 이 저 나무 다 그만두고, 한 떨기 시누대를 심어 사철을 즐기리라. 오늘도 몇 번이고 가벼운 봄바람이 저 시누대 숲을 찾아가 쉬어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기에 내 옛집에 살 적에도 서북쪽으로 시누대를 둘러 소란한 세상을 멀리 하고 비비새 소리로 해를 지우던 까닭이 여기 있다.
듣자니 그 무렵에 심은 은행나무는 30여 년이 지난 오늘엔 벌서 아름드리 거목이 되어 관재로 써도 될 것이라니, 어찌 생각하면 서글픈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산하는 모든 흥망에 초연히 제 모습을 지니고 있듯이 내 그림자를 거둔 뒤에도 이 40평 정원에 내 가꾸어 오던 나무는 제대로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어루만지는 나무의 체온이 새삼 정다워진다.
교목에 속하는 저 이팝나무 그리고 낙우송·칠엽수가 아름드리로 성장하는 날 과연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그때쯤 칙칙한 시누대 숲에서는 비비새가 새낄 쳐 나갈 것이요, 하늘에 치솟은 낙우송에 때때로 동박새 떼가 나그네처럼 머물다 갈 것이다.
이대로 날씨가 풀리고 보면 부풀어 오른 청매가 경칩 안에 필 것만 같다. 꽃받침이 진한 녹색이어서 청매 꽃은 희다 지쳐 푸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가람도 이 청매를 분에 옮겨 심고 꽃이 필 때면 으레 친구를 불러 그윽한 향기 속에서 잔을 기울였던 일이 바로 어제런 듯 선한데 이미 가람시비를 세운 지 벌써 해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