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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7 17:29
꽃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776  
 
꽃 이야기


맨 먼저 핀 꽃이 무어더라? 해마다 꽃을 가꾸면서 올엔 꽃 피어나는 대로 기록해 두려니 하면서도 실컷 그것들이 웃을 대로 흐드러지게 웃고 나서 영영 낙화가 된 뒤에야 다시 나의 게으름을 탓해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일 일터에서 네댓 시간을 말을 해야 하는 고역을 치르고 보니 레코드판도 그렇게 무작정 돌리고 보면 설키고 이그러질 것인데 어찌 꽃피는 것까지 기록해둘 여유가 생길 것인가?
다시 한 번 좁다란 꽃밭을 보살펴 보니 그래도 영춘화 꽃둥이 피었고 뒤이어 바로 복수초가 웃고 갔는가 하면 고 야트막한 땅풀 봄맞이꽃이 볼고족족하니 강섭이란 놈 볼따구니같이 예쁘게 피어났다. 덧붙여 서향이 한 그루만 있었더라도 이 초라한 초사에 흐뭇한 향기가 돌았을 것인데 올 늦은 봄에야 시험장 R장장에게 이 부탁을 해놓았으니 제대로 뿌리가 돋아 오른다 해도 내년 봄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차례차례로 라일락이 피는가 하면 모란이 피어나가고 찔레꽃이 제대로 5월을 꾸미더니 이젠 초본으로 가꾸어 오던 것들이 모두 제 구실을 하느라 제법 분주한 몸치장을 하고 있는 폼이 무슨 경연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작년 봄에 시우 R의 호의로 뿌려놓은 것들이 이젠 좁은 뜰을 꽉 덮어버렸다.
남쪽에 세워둔 장미를 맞바라보는 곳에는 황금빛 화능초에 패세공을 곁들여 심어 놓고 사이사이 산나리와 부용을 심어 꽃이 어우는 대로 뒤이어 피어나도록 해 놓고 보니 제법 멋들어진 구상이 아닐 수 없다.
달리아와 칸나는 그저 화기가 길어서 심어두는 것이니 그 풍염한 모습이 예쁠 것은 없는 것이 목덜미에 비곗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사랑스럽지만 식물이나 동물을 보더라도 살찐 것 쳐놓고 신통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단정학처럼 여윈 노인이 담담하고 그 높은 기상에 더욱 빛나는 안광을 지니고 보면 어찌 희랍조각에만 비길 것이랴? 가뜩이나 좁은 채마밭 한 모퉁이를 까붙여서 가카리아·수접란水蝶花·부용(후록구스)·시차초矢車草·우미인초·샐비어를 모 부어 놓고 날이날마다 물을 주고 가뭄에 가꾸기에 무척 애를 태웠건만 척박한 황토배기에 제대로 자라는 것이라곤 가카리아와 수정화뿐 샐비어는 좀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는데다 벌레까지 달라붙어 농약을 뿌려줘야 했다.
이번 비가 보름만 앞당겨 내려주었더라면 꽃모종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었을 것인데 모판에서 그대로 꽃이 피고 보니 그대로 올드미스가 아닐 수 없다. 화기가 늦은 샐비어를 이번에 모조리 나누고 보니 그래도 못 나눈 미련이 가시는 듯했다. 무서리가 내릴 무렵이면 더욱 새빨간 샐비어의 정열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가을에는 그래도 제각기 샐비어를 가져간 친구들이 나와 한 마디씩의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겠지….
나의 존경하는 벗 P한테 얻어 심은 후박이 두 그루나 죽어나간 뒤부터는 이 척박한 황토배기에 목본을 심는다는 것을 단념했지만 그래도 황철쭉만은 잊을 수 없어 여러 해를 별러 얻어온 것이 제법 밋밋하게 가지를 뻗기에 적이 안심했더니, 이번 가을에 그 잎이 시들고 말아 또 후박나무처럼 죽나 보다 했는데 이번 비에 겨우 목숨은 건진 성싶다.
일찍이 태산목과 백목련과 동백과 산호수를 여윈 내 슬픈 원예사에 몇 해나 더 보고 살려고 이 나이에 나무를 심을 것인가 생각하다가도 철철이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고 꽃 속에 사로잡히는 내 자신을 생각할 땐 역시 죽는 날까지는 심어보고 싶은 것이 꽃나무이다. 나는 가꾸고 싶은 것이 꽃밖엔 무엇이랴 싶어 꽃을 심어놓고 날이날마다 바라보며 이것들의 이야기와 바람에 사운대는 향기에 취해 보는 것이다.
어느 해 봄날 달이 유달리 맑은 밤이었다. Y와 술이 거나하니 취해서 돌아오던 길에 P병원 담장 너머 활짝 핀 백목련 꽃을 꺾으려고 Y를 엎드려 놓고 내가 올라서서 한 가지를 날쌔게 꺾어서 돌아오다 Y에게 그 부인을 위해서 선사한 일이 있다. 며칠 전 광주에서 온 시우 악岳을 따라 그의 중학시절의 동창이라서 찾아간 곳이 바로 P병원이었으니 원장 P는 또 바로 시인 용아 박용철의 가까운 아우였다. 그래서 내 꽃 도둑질을 자수(?)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홀가분하게 술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지금 한창 핀 글라디올러스라도 꺾어 들고 P를 찾아가 또 한 잔의 술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