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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7 23:14
매창梅窓의 멋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284  
'매창梅窓의 멋'은 1973년 6월 샘터에 게재한 글입니다.
 
 
매창梅窓의 멋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지
천리千里의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이화우梨花雨 하면 매창梅窓이 생각나고 매창 하면 선뜻 우리 가슴에 달려드는 것이 바로 「이화우」의 시조다.
설도薛濤가 당나라의 손꼽히는 여류시인이라면 매창은 황진이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정상을 차지하는 여류 시인일 것이다. 매창은 천생의 서정시인으로, ‘이화우’를 언제 어디서 외워도 가슴에 절절히 파고는 까닭은 이토록 멋진 가락으로 이별을 읊은 주옥珠玉이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세의 미모로 태어난 매창은 ‘노래 잘 부르는 매창’, ‘거문고 잘 타는 매창’ ‘시 잘 짓는 매창’으로 팔도에 그 이름이 높아 당대의 시인 묵객과 이름난 선비들이 한양 천릿길을 멀다 아니하고 궁벽한 시골 부안까지 발걸음이 잦았다고 전한다.
송도松都 삼절三絶로 자처하는 서화담徐花潭의 높은 지조를 시험하는가 하면 10 년 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벽계수碧溪水를 시조 한 수로 도취시킨 황진이도 매창의 절색과 인간의 애환을 극치로 담은 그 거문고에 따를 길이 없었으며, 절묘하고도 직핍한 그의 시 또한 황진이의 서정을 능가한 절창으로 풍미했었다. 그러면서도 황진이보다 빛을 보지 못한 까닭은 황진이의 송도는 한양 도읍과 이웃한 곳인데 비하여 매창은 부안이라는 전라도 서해안에 자리잡은 궁벽한 시골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역적 후광을 받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
매창은 부안 고을 현리縣吏 이양종李陽從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니 그때가 바로 선조 6년이었고 38세를 일기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 매창은 일명 계생桂生 또는 향금香今이라 하였고, 자字는 천향天香이라고 하였으니 매창은 그의 아호다. 서녀로 태어난 매창은 기적妓籍에 몸을 담았던 것이니 얌전한 규방에 들어앉아 있기에는 너무나 기구한 운명의 탓이었을 뿐 아니라 기적에 몸을 담지 않고서야 분방한 멋과 재주를 제대로 펼 수도 없었을 것이니 이 또한 황진이와 상통하는 길이었으리라.
당대의 허다한 시인묵객과 더불어 상영창화觴詠唱和하였으니, 그녀의 시와 미모에 반하여 인조반정을 꾀하던 연평부원군 이묵재李黙齊는 매창에게 간절한 정을 구했다 하며 고절高節과 조신操身으로 이름난 임은林隱 유희경劉希慶은 매창으로 하여 끝내 파계에 이르게 했다 하니 매창의 분망한 낭만도 ‘이화우’의 절절한 가락으로 끝맺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의하면 10 수의 시조가 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시로는 오언절구 21 수, 칠언절구 25 수, 오언율시 3 수, 칠언율시 5 수가 전해오고 있다. 널리 애송되고 있는 오언절구 한 수를 들어보면
 
醉客執羅衫취객집라삼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不惜一羅衫불석일라삼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취하신 임 사정없이 날 끌어단
끝내 비단적삼 찢어 놓았네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가람 이병기 선생이 생전에 부안읍 봉두매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읊은 시조 한 수를 끝에 얹기로 한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그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삼羅衫을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겼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