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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0 14:32
화병과 새와 노시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174  
 
화병과 새와 노시인

1.
내 작은 서재 청구원에 훌륭한 방문객 한 분을 모시게 된 것은 늦은 봄의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내 생활에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어 놓은 훌륭한 방문객으로는 흔히 오후에 황해를 넘어 와서 서창을 가볍게 흔드는 찬바람과, 때로는 버드나무와 천 년 나무에 번갈아 와서 우는 작은 산새가 있을 뿐, 너무나 고적한 나에게 이 방문객은 내가 지상에 있는 동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귀빈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방문객이란 올해 막 여든에 이르신 나의 할아버지이다. 내 비록 따로 살고 있으나 손자의 집이거니 어찌 자주 오시지 않으랴만, 지난 늦은 봄부터 부쩍 자주 오시게 되었던 듯싶다
늦은 봄 어느 날 오후, 지금 생각하면 뜰에 백합 꽃송이가 금시 터질 듯 불쑥불쑥 여문 때이니 아마 하지夏至 가까운 때였을 게다. 일터에서 돌아오니 으레 텅 비어 있는 내 서재, 그날도 역시 텅 비었으리라고 생각한 내 서재에 할아버지는 <이태백문집>을 펴들고 한가히 누워서 쇠잔한 음성으로, 그러나 고저 있게 시를 읊고 계시었다. 내가 방에 들어와 인사를 드릴 때에도 잠깐 코대답을 하실 뿐 역시 계속하여 흥겹게 시를 읊으시었다. 시흥은 바야흐로 절정에 이르신 모양이었다. 원래 육방옹陸放翁을 좋아 하시는지라 육방옹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도연명·왕유王維·위응물韋應物에 이르도록 이야기는 오래 계속되었다.
그런 지 며칠 뒤의 일이다. 할아버지는 손수 목침과 담뱃대를 내 서재에 가져다 놓으셨다. 그것은 와서 오래 누웠으려면 목침이 있어야 하고 심심하니까 담배도 피워야겠으니 둔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또 며칠 후에는 손수 사寫하신 시문집을 20여 질 가져다 놓으셨다. 그 중에는 당시집唐詩集들도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도연명시집>과 매창의 시집이 끼여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내 책장에는 고아한 한적漢籍이 늘고 가끔 서재에서는 할아버지의 시 읊으시는 소리가 나게 되었다.
노휴재老休齋에 다녀오시는 길에는 반드시 들르시게 되고, 내가 일터에서 돌아올 때가 되어도 가끔 오시어서 이 책 저 책을 내 놓고 보시게 된다. 혹 내가 어느 때 늦게 돌아오면 할아버지는 기다리시다 정안靜安한 오수까지를 하시다 돌아가신다고 한다.
뜰에 백합이 한창 피던 어느 날 오후 일이다. 아침에 나는 담박한 백합꽃의 찌는 듯한 그 향기를 방에까지 옮기고 싶어서 한 가지를 꺾어다 화병에 꽂아 놓았었는데, 그 아래에 <看甁中花枝遇吟一節간병중화지우음일절>이라는 제목의 할아버지 글씨로 백지에 쓴 시가 놓여 있었다.
‘愛花自許莫如君애화자허막여군 看取奇葩插水壺간취기파삽수호 願使東君能借力원사동군능차력 看來不厭勝書圖간래불압승서도(내 어찌 너만큼 꽃을 사랑하겠느냐만 화병에 꽂힌 꽃을 그럴 듯이 여기다가 돌아와 다시 보니 햇볕에 그만 활짝 피어 그림보다 예쁘구나)’
이것이 바로 그 시다.
아마 아침에 노휴재老休齋 가실 때 화병의 백합을 보시고 가셨다가 오후에 오셔서 나를 기다리던 끝에 오수를 하고 가시는 길에 써 놓으신 듯하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시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가 오는 뒷날 돌아가신다면 나는 누구와 앉아서 도연명을 이야기 하고 왕유·위응물의 시를 이야기할꼬? 오늘도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내 서재 한 편 구석에는 담뱃대와 목침만이 묵묵히 놓여 있다.

2.
초라한 내 서실에 새 손님이 찾아 왔다. 토림土林의 산수화가 그 억센 산줄기로 북쪽을 막아주고 동편에는 금릉金陵의 유화가 조용한 호반으로 나를 이끄는가 하면 일중一中의 횡축이 의젓하게 서쪽을 가려 주고 표암 豹菴의 담채산수가 남녘 다도해를 연상시켜 제대로 높은 격조 속에 속운의 개입을 불허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새 손님이란 갓 핀 매화 가지에 한 마리 멧새를 호젓이 앉혀 보내온 K여류 화가의  <호조일성好鳥一聲>이다.
아주 단조로운 소품인 데 더 마음이 이끌린다. 멧새의 등설기 빛깔이 짙은 녹색인 데다가 뱃지시락은 노란 빛깔로 날씬한 모습이다. 뺨 언저리가 하얀 것으로 보아 흰머리멧새가 아니면 노란턱멧새가 분명하다. 엊그제 내린 비로 경칩을 바라보는 청매가 부풀어 오르고 동박새가 더러 다녀가는 요즘 초라한 서실에서 멧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도시 예술인이란 항상 새롭게 보는 눈과 새롭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인간의 가슴에 설정함으로써 그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격이 있어 좋다. 어찌 높아 싫을 게 있으랴?
인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고, 벼슬자리 또한 높아 좋을 것이요, 그에 따른 권력과 수입이 높아 좋겠지만 그와 정비례하여 혈압이 높아진다면 질색이다. 우리는 흔히 고혈압을 두려워하지만, 정치나 경제에 그 증세가 올 때처럼 두려운 일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술에서 보다 그 증세가 많음을 본다. <호조일성>의 단조한 화폭에서는 두려운 고혈압 증세는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새 손님과의 반려를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