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
 
작성일 : 12-08-17 17:34
꽃과 더불어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8,600  
 
꽃과 더불어

1. 백련과 더불어
옮겨온 지 7 년 만에 그 청정무구한 백련꽃이 피고 보니 온 집안이 떠들썩할 만큼 환호성들이다. 해마다 꽃을 기다리다 지쳐 그저 잎새만 바라보는 것도 어디냐고 자위해 오다가 꽃대가 올라온 지 10여 일 만에 그예 만개하여 어찌나 대견스럽고 고마운지 꽃 이파리를 세어 보니 20여 개가 넘는다. 홍련보다 거의 갑절이 큰 데 더 놀랐다.
혼자 바라보기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 어제는 K와 J를 청해다가 매실주를 기울이면서 잔을 뗄 때마다 백련을 바라보며 감탄불기感歎不己했다. 더구나 청향이 복욱馥郁하니 어디 나무랄 데가 없다. 30도가 넘는 불더위고 보면 장미 따위는 피기가 바쁘게 시드는 게 흠인데 백련은 불볕도 아랑곳없이 우아하게 피어선 더구나 실바람에 꽃 이파리가 사운대는 꼴이란 정작 마음이 설렐 정도로 귀엽기 그지없다. 자세히 보니 또 한 송이 꽃대가 물 밖으로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다. 이놈은 아무래도 8월 2·3일쯤에야 필 것이다.
그때쯤엔 한라산 등반의 길을 떠나기로 H와 단단히 약속을 했는데 아무래도 저놈마저 개화를 보기 전에는 출발을 연기할 도리밖엔 없을 것만 같다. 두 번 다녀온 제주도 구경인데도 한라산을 못 오르고 말았으니 이번만은 꼭 오르기로 했지만 한 송이의 개화를 저버릴 수는 없으니 이번은 H를 불러 먼저 백련을 구경시키고 잔을 기울이며 연기를 교섭해야겠다.
어차피 뜯어 고치기 마련인 우리들의 인생 설계고 보니 H도 이 백련을 볼 양이면 마저 한 송이까지 보고 떠나자는 데 이의가 없으리라. 연당이 조금만 넓었다면 이 불더위에 떠나는 여행은 차라리 일체 가을로 미루고 모시옷으로 갈아입고 태극선으로 더위를 밀어 놓고 앉아서 백련의 청향에 묻혀 잔을 기울이는 것이 제격일 것만 같다.

2. 낙화일기
영랑永朗의 절창인 <모란이 피기까지>를 읽어 가면 가슴이 쩌릿하도록 뚝뚝 떨어지는 모란꽃 이파리가 왈칵 달려들어 가슴을 문지르는 것을 느낀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모란이 필 때까지 또 다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리겠다는 영랑의 이 절구는 그만큼 모란을 사랑했던 데서 오는 감정의 승화였으리라. 내 일찍이 고향에서 숱하게 가꿔오던 모란이었건만 그토록 아기자기한 정을 붙여오던 것은 아니었는데 영랑의 모란을 읽은 뒤부터 가실 수 없이 뜨거운 정을 들여놓기 비롯했다.
신록이 눈부신 속에 수천 송이로 헤아릴 수 없는 모란이 활짝 피어나던 그 광경이야 그대로 시야를 아찔하게 할 정도로 찬란한 것이었다. 내 좁은 정원에 고향에서 모란을 옮겨온 지도 벌서 10여 년, 이젠 의젓한 장년이 되었다. 곁들여 백목련을 세 그루 심어놓고 보니 이를 데 없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매일같이 서성이며 그 꽃봉오리가 터지기를 고대하다가 막상 꽃봉오리가 터지는 날이면 아내를 불러내고 어린놈들을 불러내곤 하는 법석을 피운다.
그러나 4·5일이 채 못 되어 모란은 시들어버린다. 영랑의 시 그대로 뚝뚝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떨어지는 꽃 이파리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어찌된 심정일까.
청매가 만발하고 백목련 봉오리가 막 터질 무렵에 서울에 가서 10여 일을 지내노라고 그 멋진 낙화를 못 본 것이 퍽은 섭섭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청매는 벌써 파란 열매가 달려 있고, 백목련도 이미 이파리가 무성하지 않은가. 청매의 자잘한 꽃 이파리가 가는 바람에 떨리며 흩날리는 그 애절한 모습, 백목련의 탐스러운 꽃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가 귓바퀴에 닿을 것 같은 낙화를 이 봄엔 영영 볼 길이 없다
오늘은 퇴근길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노라니 옷깃이고 머리에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벚꽃 잎이 발길에 걷어챌 정도로 바람에 뽀얗게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이 꽃보라 속을 걷던 나는 문득 어느 해 봄이었든가 충청도 명창이라는 노인과 더불어 나온 가람을 따라 객사동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고덕산을 넘어오는 산바람이 골자구니를 빠져나갈 때마다 몰고 오는 벚꽃 이파리가 우리들이 냇가에서 기울이는 술잔에 날아드는 것을 그대로 마시는 멋을 부리던 일이 어제런 듯 선히 떠오른다. 더구나 아무 잡념 없이 호탕하게 웃던 가람의 웃음소리와 산이 울리도록 자지러지게 빼던 충청도 명창의 노랫소리를 아무래도 잊을 길이 없다.

오고 가는 잔에
호이 꾀꼬르르 소리

바람에
지는 꽃잎
옷깃에 쌓였고나

봄은 또
깊어만 가고
꽃잎은 흩날리고

길게
빼는 노래
가락이 흔들린다

멋은 지닐 것이
늙어도 저렇거늘

멋 속엔
가람도 
아직은 청춘이어.

세월은 흘렀다.
인생의 멋을 살고 예술의 멋을 살고, 아니 술의 멋을 부리던 가람도 낙화처럼 떠난 지 1 년이 넘었다. 지금쯤 가람이 살아 계실 양이면 두견주를 빚어 놓고 아마 두세 번은 불렀을 것이다. 주인 없는 수우재守愚齊(가람의 옛집)에는 이미 산수유 노란 낙화 송이가 연못을 흘러갔을 것이요 요즘에는 텅 빈 뜰을 동백꽃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해마다 동백꽃 구경을 가던 오동도행도 금년엔 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침에 떠났다가 저녁이면 돌아오는 길인데도 속무에 얽혀 살다 보면 철을 놓치게 마련이다. 섬을 뒤덮은 그 검푸른 잎새 속에서 달덩이처럼 붉은 동백꽃이 이 대숲을 타고 오는 바람결에 바다로 떨어지는 운치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맨 처음 내가 오동도에 가게 된 것은 눈이 펄펄 날리던 날, 새벽차로 혼자 떠난 때였다. 그때 나는 지천으로 섬을 뒤덮은 동백나무를 보고 다만 놀랐을 따름이었다. 더구나 눈발 속에서 새빨간 동백꽃을 바라보고 나는 그만 어느 먼 이국에 온 착각을 느꼈던 것이다.
다음에는 형님을 모시고 갔었다. 해녀가 갓 잡아낸 전복을 안주 삼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는 해안에서 실컷 잔을 기울였다. 지금쯤은 병상에서 형님도 오동도 동백꽃과 전복을 생각하고 계실지 모른다.
그 다음에는 시우詩友 소라素羅와 더불어 갔다. 그날은 마침 수많은 소녀들을 만나 그들 틈에 끼여 청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새빨간 동백꽃이 바다에 떨어지는 소리를 귓전에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낙화 송이처럼 흘러간 날을 생각하고, 또 흘러갈 날을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 살고 있는지 모른다.


3. 꽃과 도끼
“소작료를 싣고 읍내 지주 집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간 소년은 밀린 소작료의 풍구질이 끝나서야 안팎 40릿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왔다. 짧은 가을 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 차례의 풍구질이 끝날 때가지 꼬박 지주집 사랑 뜰 옆에서 무료히 앉아 기다리기란 실로 아슴푸레한 시간이었다. 무심코 바라 본 뜰엔 갓 피어 난 황국이 눈부시고, 갖가지 꽃나무가 무성한 뜰을 가을 햇볕이 스산하게 기울어 갈 때 소년은 문득 도끼라도 있으면 그저 닥치는 대로 꽃나무를 쳐 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고학하다가 학병으로 끌려갈 뻔했던 P라는 젊은 시인이 해방 이듬해 나에게 들려 준 그의 소년 시절의 회상담의 한 토막이다. 생각하면 옛날 우리 농촌에는 제대로 꽃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어 놓고 살아갈 여유가 없었다. 봉숭아나 분꽃을 심기에도 그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느니보다 그 숱한 왜놈의 농장 소작을 지어 바치는 등쌀에 뼈가 바스라지던 판국인데 일손이 거기까지 미치지도 못했으려니와 가꾸고 바라볼 한가한 틈이 있을 리 없었다.
낙동강이, 섬진강이, 금강이 흘러가는 그 비옥한 토지가 우리 농민들의 것이었던들 어찌 봉숭아나 분꽃만 심었겠는가. 지주네 집 뜰만 치레하던 모란도 사계화도 월계화도 심었을 것이요 또 그것을 바라볼 줄도 아는 우리 민족인 것이다. 그때 들은 골병이 20여 년 동안 치료에 나섰어도 완치되지 못했기에 아직도 우리 농촌에는 꽃이 드물다. 꽃이 드문 데 그치지 않고 영양실조가 만발하는 봄도 있다. 그러기에 국민 소득은 월남만도 못한 비극이 있는 것이다.
입동 전의 일이다. 광주 전남 농대 K교수의 호의로 태산목 7·8 그루를 구해다가 심어놓고 보니 꽃밭이 제법 의젓하다. 호랑가시나무가 길이 넘는데다가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눈부시게 열리고 4년 전에 심은 태산목·목련이 이미 두 차례나 꽃이 피었고  복가시나무·동백·서리향나무·후박·장미가 모두 원기 왕성한 청년들이다.
이 식물 가족들이 제대로 성장하면, 철따라 꽃과 열매 속에서 가난한 대로 마음 흐뭇이 살아갈 것 같은데도, 문득 젊은 시인 P가 생각날 때엔, 혹시 내 집 초라한 정원을 보고도 도끼를 휘두르고 싶은 소년은 없을 것인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그렇다. 꽃을 보아도 도끼를 생각하지 않는 소년, 꽃이 소년으로 하여금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는 세상, 이것은 바로 지상의 낙원이 아닐 것인가.

4. 복수초 이야기
이상난동의 탓인지, 경칩이 오기도 전에 복수초가 피었다.
우리 집 뜰에서 서향에 앞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이 복수초 꽃이다. 해마다 3월 중순쯤 돼야 피는데 올해는 성급하게도 2월 그믐날 피었으니, 봄도 갈 길이 바빠 꽤 서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계절은 가고 올 때마다 선머스마가 아니면 말괄량이처럼 수다를 부리는 게 일쑤다. 지난밤에 급행을 타고 흰 손수건을 흔들었을 겨울이 지금쯤은 서울을 지나 그 어마어마한 완충지대 근처의 경비지역을 노려보고 있지나 않을까 생각했더니 복수초가 강섭이란 놈의 손가락만큼이나 솟아올라왔는데도 뜻밖에 아침부터는 눈송이가 빠지는 것이 아닌가?
영하 10여 도가 넘는 차가운 혓바닥으로 핥을 수 있는 것은 거의 핥았을 것인데 선선히 자리를 물려주고 나가기에는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 사람과 다름없는 겨울의 심정인가 보다.
나는 큰 도둑놈이나 침입한 듯이 에레나를 불러서 먼저 복수초를 왕겨로 덮도록 일렀다. 파란 이파리도 이파리려니와 놀미욤한 꽃봉오리가 늦서리에 못 배겨내는 것을 어찌 눈송이에 견딜 수 있을 것이냐? 꽃 한 송이 제대로 보기에도 노인 시중 드리는 데 못지않은 정성이 드는 것은 나만이 겪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복수초를 처음 보게 된 것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20대의 시절이고 보니, 벌써 40여 년 전으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우리 몇몇 친구들이 서둘러 만든 산유회山有會라는 작은 모임이 있어 계절 따라 등반이라기보다는 산야를 소요하는 것으로 일삼던 것이었다. 물론 회칙도 없으려니와 회원 명부마저 없이 그저 마음 내키면 모여서 때와 장소를 정하고, 그리고 출발해서 2·3 일 쉬어 오는 것이 이 모임의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 고을뿐 아니라 호남의 금강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변산은 우리가 철철이 찾아 가는 유일한 등산 코스인지라 우리들의 발걸음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치 샅샅이 답파해서 눈을 감아도 변산이 선히 떠오를 지경이다.
2월 그믐께만 되면 진달래로 이름난 춘변산春邊山 탐방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 산유회의 연중 행사의 시발점이었다. 그때 우리 일행은 내변산으로 접어들어 청림 계곡을 돌아 줄곧 의상봉을 오르기로 했다. 변산의 최고봉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600미터이고 보니 그 시절의 우리 젊음에 비하면 아예 마음에 차지 않는 노정이었다. 제법 절벽이 험준하여 등반에 힘이 드는 코스인데다가 읍지邑誌에만 전해오는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이라는 암자가 바로 의상봉 절벽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 일행이 처음 찾아 낸 것도 그때의 커다란 수확이었다.
방장암은 신라 때의 고찰로 절벽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찾아간 사람이 없어 줄을 매달고 가까스로 올라갔더니 십여 평 되는 절 터에 연화대가 남아 있었다. 절벽에는 암자를 매달았던 쇠고리가 그대로 있었다. 묵은 기왓장을 헤치다가 머리가 달아난 3·4촌 남짓한 금동불을 발견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월명암에 전했던 그 부처는 지금 전주 도립 박물관에 소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길로 의상봉 정상에 올라 억새풀이 뒤덮인 곳에서 굴러다니는 기왓장으로 의상암 절터를 찾아내고 보니 바로 그 옆 바위서리, 얼음이 꽁꽁 얼어 붙은 바위 사이에 갓 피어난 복수초가 무더기로 있었다. 식물도감에서만 보아 오던 미나리아재비과의 복수초의 실물을 구경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무슨 큰 발견이나 한 듯이 나는 그만 환성을 올렸었다. 그 길로 실상사를 찾아가 하룻밤을 지낸 뒤 화전놀이 채비를 챙겨가지고 우리들은 봉래구곡을 거슬러 직소폭포를 중심삼아 자리를 잡았다.
진달래 꽃잎을 뜯어오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천어를 낚아오고 하여 푸짐한 화전놀이 판이 벌어졌다. 때마침 난데없는 춘설이 몰려오더니 삽시간에 온 산이 허옇게 뒤덮여 숱하게 핀 진달래와 춘설이 어울려 이룬 그대로의 절경 속에 우리는 묻히게 되었다.
우리는 눈 속에서 화전을 붙이고 천어를 끓여 노적露積메 약주로 피로를 달랬다. 노적메 약주라면 사이다처럼 버큼이 툭툭 튀는 이름난 술이다. 입술이 쩍쩍 들어붙은 명주로 경주 법주 따윈 따를 재간이 없으리라. 노적메라면 물 좋기로 변산에서도 이름난 마을이려니와 누대로 내려오는 토반 고씨네의 집단 부락으로 술 담그는 솜씨도 고씨네의 비법에서 전해 나온 것이라 짐작이 갔다.
그 무렵만 해도 수령 백 년이 훨씬 넘는 영산홍이 고씨네 집에 여러 그루가 있어 영산홍으로 이름난 동네다. 그 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 마을 영산홍도 서울 신홍 거부의 정원으로 팔려갔다는 소식이고 보니 노적메 약주와 더불어 영산홍도 이젠 옛 이야기가 된 모양이다.
귀로에 우리 일행은 직속폭포 뒤 대소大沼 골짜기에서 복수초의 군락을 발견하고 몇 포기씩 채집해 가지고 와서 해마다 복수초를 집에서 구경하게 되었다. 아마 지금쯤 고향 집 뜰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옆에 심은 복수초가 피어났으리라.
전주로 옮아 온 지도 어언 20여 성상, 춘분을 전후해서 꽃장수들이 캐내 오는 복수초를 심어 벌써 20 년이 넘는데 역시 일번 타자로 봄을 몰고 오는 것이 이 복수초다. 연이어 꽃봉오리가 올라오는데 요즘 날씨가 변덕을 떨고 있어 적이 걱정이 되지만 경칩이 지났으니 설마 눈발이 빠진들 못 견딜 리야 없으려니 하고 자위하고 있다.
모과나무 옆에 자리 잡은 서향도 꽃봉지가 짜개지더니 청매와 다투어 복수초의 뒷자리를 차지할 요량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이렇게 한가히 늙어가는 것이 외롭지 않은 것도 일 년 내내 내 옆에서 호흡을 같이하고 서 있는 나무들과 철따라 피고 지는 저 죄 없는 꽃들이 내 옆에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