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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7 17:23
행복의 최대공약수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188  
 
행복의 최대공약수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기에
아 !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읍네
산 너머 저쪽 더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하건만
칼 붓세 「산 너머 저쪽」

행복을 추구하다가 행복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그대로 후진할 자세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칼 붓세(Karl Busee, 1872~1918)처럼 추구하던 행복을 단념하고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올 수는 더구나 없을 것이요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철학적 견지에서 혹은 임의로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인간이 최초로 의식에 눈 뜨면서부터 그 종국에 이르기까지 가장 열렬히 추구하여 마지않는 것은 오로지 행복의 감정이다. 그리하여 이 지상에 있어서는 실제로 행복이란 구할 수 없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기에 이른 순간은 그가 경험한 가장 비통한 순간일 것이다.’라고 힐티(Karl Hilty, 1833~1909)가 말했듯이 추구하던 행복을 단념하고 돌아왔다면 얼마나 불행한, 아니 그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비극일 것인가?
어찌 생각하면 인류역사란 행복을 추구하는 부단한 노력의 결정을 기록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오늘까지 누적된 기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누적을 약속하는 미래사 또한 이 행복을 추구하는 영원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사색하는 것, 또는 모색하는 것, 염원하고 희구하는 것, 이 모든 총화는 끝내 행복을 얻자는 데 있다. 황당무계한 공상이나 환상까지도 불행한 현실에 뿌리박은 인간이 이보다 고차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의 일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천재시인 이상李箱은 ‘인간의 비극은 돼지가 아닌 데서 출발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항상 돼지스런 본능이 아닌 것을 요구하기에 슬프고 괴롭다. 만일 인간이 돼지 이상의 본능을 욕구하지 않는다면 정치·경제·사회·종교·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는 무관심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돼지가 아니기에 이에 대하여 치열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우리의 가치의식과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이기 때문에 불만을 갖는다. 이 불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불만·불행으로 얼룩진 현실이 아닌, 보다 위대할 수 있고 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현실을 향유하고 싶어 한다. 갖고 싶어 하는 명일明日을 어떻게 하면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다 빠른 시간에 획득할 것인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갖고 싶어 하는 명일이란 바로 행복을 의미한다. 행복이란 인간생활을 좌우하는 근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인류역사는 얼마나 임리淋漓한 선혈로 점철되었는가?
골고다의 산중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고, 왕실을 뛰쳐나온 석가모니는 결가부좌結跏趺坐로 고행을 하였으며, 소크라테스는 태연자약泰然自若한 속에서 독배毒杯를 들었던 것이니 이 모두 중생을 위한 임리한 피의 기록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피투성이로 싸우기를 사양치 않는다. 실로 행복이란 인간생활의 기본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보 전진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피투성이로 싸우는 사람, 혹은 싸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예수와 출가한 석가와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가 모두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은,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한 데서 이루어진 광망光芒이기에 인류사가 종말을 고하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위치할 것이다. 우리 가슴의 한 구석에 그들이 위치할 수 있는 스페이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또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 이 행복의 치열한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또다시 한 사람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치 않는다. 한 사람의 왕자가 출가하기를 원치도 않는다. 한 사람의 소크라테스가 또 독배를 마시기를 원치 않는다.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공동체를 움직이는 모든 성원이 공동으로 그 행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고 출가를 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독배까지도 의연히 들어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역사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간상일 것이요, 또 내일의 역사가 요구하는 인간상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욕구하는 행복이 단테의 천국처럼 인간생활의 피안에 있다면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후예들에게 송두리째 맡겨 두어도 무방하리라. 염세와 행복은 그 거리가 너무나 멀 뿐만 아니라 그런 소극적인 철학이 오늘의 역사적 상황을 구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면 몽상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는 빈델반트(Wilhelm Windelband, 1848~1915)의 말에서 나는 진리를 행복으로 대치한다고 해서 큰 과오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행복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찾는 진리이기 때문에 행복과 진리에 어떤 간격이나 차이를 둘 수는 없다고 믿는다.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역사가 요구하는 새로운 인간상이란 이 지난한 진리를 위해서 사는 위대한 인간상이 아닐 것인가? 오늘의 역사적 상황은 한 개인의 힘으로(그것이 철학적이건 영웅적이건 불문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할 그런 안이한 세계의 상황 속에 불행히도 우리는 살고 있지 않다. 물론 그 개인의 위대한 행동에 대한 가치기준에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보다 많은 사람, 아니 공동체의 전원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이 그렇게 기구하고 있는 행복이란 도시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으니, 다시 이것을 구분하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이다. 임어당은 이것을 구분하여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보고 있다. 슬픔·외로움·육체적 고통이 전연 없는 상태의 행복을 전자로 보고,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의 행복은 환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이 환희 속에서 모든 생물은 생을 향수하고, 이 환희 속에서 세계는 유지되고, 이 환희를 향하여 세계는 움직이고 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을 가릴 것 없이 또는 임어당식으로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을 막론하고 현실적 문제로 정치적·경제적 보호 없이 행복의 성수成遂는 불가능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으니 정치·경제의 비옥한 배양지가 아니면 예술은 개화할 수 없는 것과 다름없다.
예술은 순수한 것이라고 한다. 순수한 예술을 창조하는 인간의 순수한 정신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두 말할 것 없이 정치와 경제에 의존하는 생활인이 바로 그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가란 말이다. 생활을 떠나서 예술이 있을 수 없듯이 정치와 경제를 떠나서 예술이 있을 수 없듯이 정치와 경제를 떠나서 생활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다.
요약하면 행복도 보다 아름다운, 그리고 보다 선한 생활을 영위하자는 데 그 근본 목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어디까지나 생활자인 것이다. 예술은 순수하고 고고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와는 전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예술에 대한 지고한 예의로 여기는 일부 순수고집파가 없지는 않으나, 예술은 한 그루의 나무나 한 포기의 풀이 무기질을 흡수하여 유기질로 변화하는 자연 발생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예술 본래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곳에 예술의 의의와 가치가 있다. 그렇듯 행복 또한 정치·경제의 보호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飯蔬食飮水반소사음수하고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라도 樂亦在其中낙역재기중이라’식 도학자풍의 행복을 오늘 찾는다면 그것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을 국한하여 생각하면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이 있을 것이요, 미국적인 그것과 중국적인 그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타골의 말처럼 서구문명이 성벽에서 발상했다면 동양문명은 삼림에서 그 남상濫觴을 찾을 수 있듯이, 서구식 행복은 물질적인 데 비하여 동양식 행복은 다분히 정신적인 데 있다고 보아 지나친 오산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마치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듯 육체만의 인간과 정신만의 인간을 찾는 것과 추호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봄을 기다리는데 「소한도消寒圖」라는 그림을 벽에 그려서 걸어 놓는다고 한다. 그 그림은 매화나무에 여든 한 송이의 꽃을 그려 놓고 동짓날부터 매일 한 송이씩 채색을 하여 그 채색이 끝나면 봄이 된다는 풍류스러운 대춘待春의 이야기이다. 모르면 모르되 서구에서 이렇게 유한幽閒한 풍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멋있는 대춘의 노래이랴.
얼핏 생각하면 시시한 생의 향락 같지만 동양 독특의 이 멋이야말로 고차적인 행복 추구의 정적아취靜的雅趣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의 동적動的인 아취를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생활양식이 정적인 데 기초를 두는 동양과 동적인 데 그것을 두는 그들의 양상이 다를 뿐 그것의 가치관에 있어서 하등 차이를 두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구의 표면에서 인간의 생활이 영위되고, 이 영위되는 생활이 가치 있는 것을 요구하는 근본 목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서식하는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데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희구하는 행복의 궁극 목적인 것은 더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행복의 궁극 목적을 모색하는 방법과 수단이 바로 그 최대공약수를 찾는 길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과 수단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현되었다. 혹은 종교적 방법으로 선량한 표정을 하는가 하면 혹은 철학적 방법으로 진지한 표정을 하기도 하고 혹은 윤리적·도덕적 방법으로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가장 점잖은 표정을 하는가 하면 혹은 예술적 방법으로 아름다운 표정을 하고 또는 과학적 방법으로 가장 냉혹한 표정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방법은 다 행복을 추구하기에 없지 못할 선택된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항상 문제되는 것은 그 수단에 있다. 이 수단의 우열로써 우수한 방법이 때로는 뒷걸음질치는 위험이 전연 없지도 않았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회고할 것도 없이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수히 겪은 평화를 약속하는 전쟁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졸렬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과연 전쟁을 근절시킬 전쟁, 다시 말해서 인류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초래할 전쟁이 아직 우리 인류 역사에 기록된 일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불의와 타협할 수는 없다. 더구나 평화를 위장한 전쟁과는 더욱 타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우리는 안심한다.
‘크나큰 반동이 이윽고 오는 것을 그대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옹호하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류의 길은 산山길입니다. 나선상螺旋狀으로 오르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후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는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老 르낭(Renan, 1832~1892)은 젊은 롤랑 로망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불행하다. 오랜 전쟁에 시달리고 여러 번 역사가 뒤바뀌는 동안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너무나 피로할 대로 피로했다. 그러나 르낭의 말처럼 역사는 결코 후퇴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나선상이기에 성급한 사람들은 때로 착각하지만 그것은 항상 정점을 향하는 전진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정점에 도사리고 있는 행복을 붙잡기 전에 등반을 단념하고 붓세처럼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올 수는 없다. 이 정점을 오르기에 우리는 지쳤다. 심한 조갈증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 개의 신선한 능금이 먹고 싶다. 그러나 이미 먹은 지혜에 눈이 뜬 이브의 능금은 아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빌헬름 텔의 능금도 아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능금도 아니다. 색채가 선명한 세잔의 능금도 아니다. 이 모든 지혜와 자유가 짜낸 행복이란 능금만이 우리의 이 극한의 조갈증을 풀어 줄 것이다.
아나크레온(Anacreon)이 사랑하는 여인의 거울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여인의 의상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여인의 향유香油가 되고 싶어 하고, 그 여인의 목욕沐浴물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여인의 옷고름이 되고 싶어 하고, 그 여인의 진주목걸이가 되고 싶어 하고, 끝내는 그 여인의 신발이 되고 싶어 하듯이 우리는 행복한 오늘(내일이 아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