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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7 17:10
토요일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102  
 
토요일

1. 토요일
내가 철이 들라 말라할 무렵의 일이다. 집안에 돌날이나 생일날이면 으레 어머니께선 삼신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서 명과 복을 빌기 마련이었는데 “명은 삼천갑자 동방삭의 명을 태워주고 복은 석숭이의 복을 점지해 주소서” 하고 자못 심각하게 빌던 것을 나는 귀가 무르도록 들었다. 천석군千石君이와 만석군萬石君이의 등쌀에 오죽이나 살기가 고되었으면 그런 축원을 했을 것인가 생각하니 어머니의 충정이 새삼 눈물겹다. 
토지개혁 덕분에 으스대던 그 천석군이와 만석군이의 꼬락서니는 보지 않아서 속 편하지만 이젠 달러가 있어야만 으스대고 살 수 있게끔 세상은 변했다. 오늘 어머니가 살아 계시었다면 삼천갑자 동방삭의 명을 빌기 전에 달러를 많이 점지해 주도록 축원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달러의 본 고장 미국에서는 금요일 오후만 되면 일손을 놓고 뿔뿔이 주말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토요일을 우리보다 하루 앞당겨 놓은 셈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 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것은 <창세기>의 한 구절이지만 만일 하나님이 오늘의 부자나라 미국의 주말여행을 미리 아셨던들 토요일을 하루쯤 앞당기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시던 거룩한 일손을 좀 더 바쁘게 서두르지나 않았을는지…
따라서 우리도 금요일 오후부터 포근히 토요일과 일요일을 안식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80달러가 겨우 넘는 우리의 연소득으로는 단 하루를 연장하는 일이지만 천당보다 까마득한 꿈 이야기다. 오늘 우리는 토요일 오후부터나 겨우 일손을 놓고 안식일­ 편히 쉴 수도 없는­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반공일의 토요일과 온공일의 일요일이 건재할 뿐이다. 그러나 콩나물 한 줌 사는 데도 아내가 외상을 달리고 오는 한 토요일 오후의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고, 컬컬한 목을 축이는 왕대포 한 잔도 목에 걸리는 요즘의 토요일이다.
가만있자 어느 해 봄이었더라… 술에 마냥 녹초가 되어 양복 겉저고리를 벗어 거꾸로 들고 쏘다니다가, 그 소중한(?) 양민증과 수첩·만년필 할 것 없이 죄 잃어버리고 탈레스처럼 오리온성좌를 바라보며 허둥지둥 돌아오던 것도 이미 춘분 가까운 어느 토요일에 저지른 낭만이었으리라.

2. 주말여행
베이비골프를 하자는 구영丘影과의 약속이 있어 공원에 가는 길에 S일보 총국에 들려 P를 찾았다.
비행장 청소 오물에서 찾아낸 득의의 세이버 Z기의 조종사가 신던 구두를 면하게 된 것은 그로서도 좀 오래된 일이지만, 아직도 미군 사지 쓰봉을 사수하는 P의 머리에 난데없는 헬멧이 놓여 있는 것은 확실히 P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몸치장이 아닐 수 없었다. 엿장수도 체신부도 승려도 노인도 대학교수도 헬멧을 이 항구에서는 150 환이면 구할 수 있기에 P도 갑자기 모자계帽子界의 민주주의자가 된 모양이다. 간이화된 인사로 쥐어보는 P의 손아귀에서 너무나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매처럼 매서운 눈망울의 주인공 P의 어딘지 야만적이면서도 넌지시 웃는 매력적인 모습에서 잃어버린 내 청춘을 회복할 수 있을 듯싶다.
P가 이끄는 데는 항상 약주를 마실 수 있는 곳뿐이었는데 오늘은 천만 의외로 다방으로 가자는 데 나는 놀랐다. 오래 만나지 못한 동안 P도 문화인(?)에 접근할 수 있는 공부를 착실히 연습한 모양이다. 신사구두에 헬멧에 다방 출입까지 하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그 투박한 미군 사지쓰봉 벗는 것이 P의 숙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P가 미군 사지 쓰봉을 벗게 될 무렵에는 아마도 그 신사구두가 다시 아가리를 벌리게 될 것이다. 그의 헬멧 역시 그때까지  계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철 머리에 얹고 다니지나 않을까 싶다. 섣불리 연습한 문화인이 싫어서 P는 또 한 번 야만으로 귀의할 위험성이 농후한 인물이다. 만일 P도 계속적으로 문화인 행세를 하려면­그가 원하는 것도 아니겠지만­미군 쓰봉을 벗는 것과 구두와 모자는 그만두더라도 최소한 양담배를 필 줄 알고, 차 한 잔쯤 마실 수 있는 문화성을 구비해야 될 게다. 그러나 P는 양담배와 차를 마시는 문화인이기에는 쌀·장작이 더 필요한 문화인이요, 커피보다는 차라리 막걸리나 약주에서 더 심오한 인생을 찾아낼 줄 아는 문화인인 것이다.
전원다방에서 P는 그렇게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나랑 커피를 마시고 오찬을 끝냈다. 우리는 갈대같이 키가 기다랗고 가냘프기 흰나비 같은 젊은 시인 R의 주선으로 ○○부 소속의 발동선을 교섭하여 장항 앞바다를 둘러오기로 했다.
백양촌과 구영과 J마담이 공원에서 베이비골프를 할 무렵 우리의 발동선은 금강하류를 향하여 사뭇 내려가고 있었다. 몇 마력이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파도를 헤치는 게 아니라 그대로 찢고 나가는 그 힘에 참으로 가슴이 툭 터지는 듯 후련했다.
이리하여 술이 거나한 P도 갈대 같은 R도 나도 마도로스가 되었다. 눈결에 제련소를 지나고 송림이 가까워 올 무렵 P는 타수한테 핸들을 인계받아 제법 먼 항해를 꿈꾸는 듯할 때, 나는 선장실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어디까지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부두 가까이 와서 P가 깨우는 바람에 나는 일어났다. 백양촌과 약속한 차 시간은 부두에 배가 닿았을 때 이미 지났고 고향에 가서 지어 와야 할 아내의 생맥산生脈散도 오래 못 보던 영이와의 만남도 P와 R덕분으로 다음 토요일로 연기하고 그대로 뜻하지 않은 주말여행을 하게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