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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6 15:34
蘭草 잎에 어둠이 내리면 -書者心畵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159  
 
書者心畵

모필을 잡고 글씨랍시고 서 본 것은 열 살 전후의 일이고 보니, 본격적인 글씨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려서 할아버지께서 매일같이 한적(漢籍)을 베끼시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일이 있고, 좀 숙성한 뒤에는 형님이 董其昌의 체첩을 놓고 글씨 공부하는 것을 눈여겨 본 일이 있어 王羲之가 명필이니, 翁方綱․岳究․米芾․顔眞卿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를 귀 동냥으로 들어 알게 되었고, 秋史니 李匡師니 李三晩이니 하는 이름도 그 무렵에 귀에 익히 들었던 것이다.
집안에 상사(喪事)라도 났을 때에는 부고(訃告) 봉투 한 장 쓰는데도 쩔쩔 매던 나의 악필에 자못 이맛살을 찌푸리시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였으니 나의 악필도 무던한 편이었다.  그 뒤 악필의 누명만이라도 면해 볼 심산으로 때로는 서투른 대로 붓을 들어 편지 나부랭이를 써 보는 만용을 부려 보기도 하고, 더러는 당시(唐詩)줄이나 베껴 보기도 했지만 좀체 글씨는 제 틀이 잡히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 있는 서예가의 쳇불이라도 놓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보았다면 모르지만 만년필을 들고 내두르는 식으로 쓰고 보니 천생 글씨가 될 턱이 없다.
王羲之의 장강(長江)의 물줄기처럼 구김살 없는 전아웅경(典雅雄勁)한 필법이야 입신(入神)의 경지에서 비로소 나오는 신운(神韻)이니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董其昌의 청수한 운필(運筆)이나ㅣ 岳究의 자유 분망한 필법은 그대로 「飛流直下三千尺 」의 호기가 엿보일 뿐이다. 어찌 그 뿐이랴. 李匡師의 걷잡을 길 없이 휘두르는 초서(草書)는 그대로 가야금의 잦은 머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가락이요, 李三晩 또한 王羲之의 계통에서 나온 트집 잡을 데 없는 「天衣無縫」의 신운이니 오직 재탄 삼탄을 금할 길 없다.
서투른 대로 어느 정도 서예의 오묘한 멋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붓을 들기란 무슨 죄나 저지르는 것만 같아 섣불리 붓을 들어 선뜻 써낼 수 없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3년 전에 처음으로 광주에서 시화전을 열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서툴러도 자작시(自作詩)에 자필로 쓰는 것이 의의가 있으리라 싶어, 내 딴에는 용기를 내어 40여 점을 자필로 전시했다.
시화전을 열던 다음 날, 광주 방송국에서 대담(對談)의 요청이 있어 그 후의가 고마워 나가게 되었다. 아나운서와의 30분 동안 대담을 예의적으로 그렁저렁 끝내고 난 뒤 여담으로 들어갔을 때,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이번 시화전은 대단히들 호평인데도 글씨가 너무 어려워서 관람자들이 읽기에 힘이 든다는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글씨 쓴 사람을 묻지 않아서 그런 대로 안심이 되었으나 내심 나는 몸둘 바를 몰랐었다. 40여점의 작품이 모조리 나가고 모자라서 5. 6 점을 추가했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그 작품을 걸어놓고 때로 읽어나가다가 모르는 글자에 부딪치면 글씨 쓴 나에게 책임을 돌리기에 앞서 무슨 명필이나 대하는 듯이 몰라보는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릴까 싶어 민망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한 번은 부산에 계신 k 시백(詩伯)을 괴롭힌 일이 있다. 중국산 옥판선지(玉板宣紙)를 서울에서도 구할 길이 없어 부탁 편지를 낸 일이 있었는데, 그 뒤 전주에 찾아준 k 시백이 하는 말이, 그때 보낸 편지는 두세 번 읽었는데도 한 자만은 지금도 알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한 자를 몰랐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저녁 굶은 초(草. 편지)가 됐던들 옥판선지(玉板宣紙)는커녕 편지도 구할 수 없을 뻔했다. 작년 이만 때 일이다. 수필집을 보내 온 R여사에게 사례 회신을 띄웠더니, 다시 그 편지에 회답이 오기를 <선생님의 옥필을 틀에 넣어 제 방에 걸어놓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사연이었다.
하찮은 편지 몇 줄을 틀에 넣어 걸어놓겠다는 그 구절을 막상 읽었을 때, 나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하게 상기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보다는 차라리 「冷汗三斗!」어찌할 바를 몰랐다고나 해 둘까. ……이렇게 되고 보니 글씨란 함부로 긁적거릴 게 못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을 따름이다.
「言者心聲」이란 말이 있다. 말이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라는 뜻이리라. 말을 조백(早白)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교양을 말하는 것이다. 서예에 있어서도 글씨를 가리켜 「書者心畵」라 하니, 어찌 섣불리 붓을 들어 함부로 내두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컨대 그 사람 됨됨이 속되지 않으면 그 글씨 또한 속기(俗氣)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잘 쓰고 못쓰는 것은 그 천품과 공정에 맡길 일이되 탈속의 경지에 이르기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秋史 行書 몇 폭을 구하게 되었다. 평생의 숙원을 이루게 되어 나 혼자 환호작약한 일이 있다. 가끔 좁은 서실에 걸어놓고 볼 양이면, 王羲之의 귀족적 서체보다 차라리 앞선 그의 탈속한 필법에 다만 망연자실할 따름이다.
그러기에 초기에 董其昌의 필법을 따르다가 翁方綱을 거쳐 秋史體를 정립했으니, 秋史翁의 청정강직(淸淨剛直)한 인격이 일자일획(一字一劃)에서 생동하는 것을 볼 때, 과연 「書者心畵」 그대로가 아닌가 싶었다. 곧 병풍으로 꾸며 그 괴석 같은 글씨에 의지하고 앉아서 창밖에 눈 오는 소리라도 들으면서 조용히 여가를 달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