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부른 목가
- 전원에의 향수
들길에 서서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 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들어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문학이라는 고질
불행한 소년 시절이 지나갔다. 가난한 학문이 누대를 억누르는 속에서 나의 소년시절은 꿈과 낭만을 가꾸기도 전에 가실 길 없는 상채기 투성이로 유치할 수밖에 없는 고독과 우울에서 보냈던 것이다. 극히 내성적이고 염세적인 소년은 문학에서 구원의 손길을 찾아오다가 열일곱 나던 봄에 「기우는 해」라는 짧은 시가 조선일보에 발표된 이래 문학이라는 고질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한 동안 노장철학을 섭렵하다가 끝내 청운의 뜻을 품고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 스물 네 살 나던 봄. 아내와 어린 것은 그대로 소작 논 몇 마지기에 매달아 둔 채 훌쩍 중앙불교전문 강원생이 되었다.
<불유교경>과 <사십이장경>을 손쉽게 떼고 난 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강을 받게 되던 5월 어느 날 뜻밖에도 난데없는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동대문 밖 지리엔 서투르니 틈 내서 한 번 꼭 나와 달라는 사연이었다. <시문학>의 박용철이 띄운 것이다. 강원 앞뜰에는 보리수나무 꽃이 만개하여 향기가 진동하는 오후 나는 기신론 강을 끝내던 길로 낙원동 시문학사를 찾아 갔다. 한복 차림의 창백한 얼굴에 몹시 수척한 청년이 바로 용철이었다. 서로 문통이 있던 사이라 일면여구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정지용과 이순석이 들어왔다. 까만 명주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으로 차린 두메 셋님 같은 지용의 모습은 양복차림으로 스마트한 청년 화가 이순석과는 대조적인 인상을 주었다.
이윽고 술상이 들어왔다. 주거니 받거니 술이 거나하게 되자 지용은 자작시를 비롯하여 나의 시, 편석촌의 시를 원고를 펼쳐들고 낭독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내는 솜씨가 어찌 멋이 철철 흐르던지 우리는 귀를 모두어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시를 읊고 나더니 불쑥 “석정은 프로 시를 쓰지 않고, 왜 이런 시를 쓰는거야?” 라고 말했다. 그 무렵 프로 시가 문단을 풍미하던 때라 신진이라면 으레 프로 시를 써야만 행세하는 판이었다. 지용의 이 말에는 야유 반 의문 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마냥 취한 우리는 밤이 이슥해서야 낙원동 시문학사를 나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거리로 나왔으나 밤이 이슥한 데다가 전차도 이미 끊어지고 어떻게 곤드레가 되었던지 동대문 밖 대원암까지 갈 생각은 엄두도 낼 수 없어 그 길로 당주동에 사는 종자형 성해 댁까지 겨우 찾아가서 그날 밤을 앓다시피 보냈다.
그때부터 불경공부는 부업으로 밀어부치고, 틈만 나면 시문학사로, 연건동 편석촌 집으로, 명동다방으로 쏘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같은 강원에 있던 조종현도 곧잘 나의 동행이 되어주곤 했다. 종현은 이은상을 찾아다니며 시조 공부에 여념이 없던 때로 같이 나가는 날이면 동아일보 학예부로 동광사로 불교사로 돌아다니는 게 일과였다.
학문으로 배운 신심信心
춘원을 만나고 요한을 만나고 만해스님을 만나던 때가 모두 그 때의 일이었다. 편집실 문밖에까지 전송을 나오는 춘원, 동광사에 가면 시 원고를 내놓고 가라던 요한, 불교사에 들러서 듣던 만해 스님의 그칠 새 없는 장광설, 모두 기억이 새롭다.
여름 방학이 닥쳐왔다. 나는 매일 총독부 도서관(지금 국립도서관)에 나가서 루소와 타고르의 작품을 찾아 탐독하고 일찍이 섭렵해 오던 노장철학을 다시 굽어보기 시작했다. <도덕경>은 하상공河上公 주註와 왕필王弼 주註를 구해놓고, 다께우찌 요시오無內義雅의 <노자연구老子硏究>를 샅샅이 읽어 내리고,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을 굽어보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나는 강원생들과 함께 <원선>이란 회람지를 시작했다. 문학 지망생들의 동인지로 철판에 긁어 등사로 냈던 것이다. 그 뒤 30여 년이 지났으니 문단에 등장한 친구도 없지 않으련만 그 당시 동인들의 이름도 기억할 수 없으니 알 길이 전연 없다. 다만 대원암 뒷채에서 내 시중에 정성을 들이던 광조라는 소년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다. 그는 지금쯤 어느 절 주지를 맡아보고 있는지, 아니면 어느 포교소를 지키고 있는지 문득 생각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해가 바뀌었다. 만주사변이 터지고 세상은 뒤숭숭하기 시작했다. 기신론의 종강을 마치고 나니, 한영스님은 친히 나를 불러 앞에 앉혀 놓고,
“신 군도 이젠 기신론을 끝냈으니 신심이 나는가?”
“저는 불교를 학문(철학)으로 배운 것이지, 종교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신심이 안 나다니 신 군은 헛것을 배웠구만……”
태연하게 하시는 말씀인데도 그렇게 명랑한 얼굴은 아니었다. 학문에 신념을 갖는 것과 신심을 내는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는 문제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불쑥하고 난 대답으로 스승의 마음을 흐리게 한 것만은 오늘에 이르도록 죄스럽기 짝이 없다. 금강산으로 입산수도의 길을 떠나자는 동료들의 간곡한 청을 물리고 나는 귀향의 길을 서둘렀다. 몇 마지기 안 되는 전답이지만 그 악랄한 지주의 착취 대상으로 젊은 아내를 그대로 맡겨두기가 너무나 가슴아팠을 뿐 아니라, 서울 생활을 더 지탱해낼 도리가 없었던 데도 그 원인이 컸다.
청구원 목가시인
시골로 떠나면 문학하는 데 시간은 있겠지만 자극을 받을 길이 없으니 떠나지 말고 더 견디어 보라는 편석촌의 간곡한 이야기도 좋은 충고엔 틀림이 없었으나 시골로 돌아가 물려받은 가난과 싸우면서도 좀 더 인생을 건실히 살아야겠다는 나의 결의는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말았다. 돌아오던 길로 소작 전답을 얻어들이고, 저 도연명이나 카펜터처럼 일생을 조촐한 속에서 살아 갈 것을 다짐했다. 삼 년을 걸려서 소작농에서 얻은 벼로 집을 하나 마련해서 그 동안 우거하던 오막살이를 면하고 청구원이라고 격에 맞지 않은 멋진 이름을 붙이고 앞뜰에는 은행나무·벽오동나무·자귀대나무·모란을 심어 가꾸고 동쪽에는 감나무 서쪽에는 시누대를 심어놓고 측백나무로 울을 두른 제법 조촐한 집으로 꾸몄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던….
처녀시집 <촛불>에 나오는 은행나무와 대숲과 푸른 하늘은 모두 청구원에서 얻은 것들이다. 모두 꿈과 낭만이 넘치는 나의 초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안서의 칭찬도 컸지만 그때 편석촌은 나를 목가시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무렵에 멀리 황해도에서 찾아온 문학 소년이 바로 중학을 갓 나온 장만영이요 중학 2년을 다니던 서정주도 이때에 처음 만난 문학소년이었다. 거의 매년 찾아주다시피 하던 만영과 정주는 청구원 시절의 가장 반가운 손님이었으니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만영은 나의 동서가 되었던 것이다.
시와 더불어 살리라
가람과 조운曺雲이 찾아주던 것도 이 무렵.
그것을 인연으로 가람은 오늘에 이르도록 나의 문학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6·25뒤 7, 8년을 같이 전북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된 것도 모두 그 때 맺은 인연의 탓이다.
1939년 오래 벼르던 나의 첫 시집이 나왔다. 12월 28일 오후 6시 경성그릴에서 <촛불>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었으니 상경하라는 편석촌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나는 서울로 뛰어 올라갔다. 실로 9년 만의 상경이었다. 그 동안에도 황해도 배천 온천엔 만영을 찾아 매년 겨울 서울을 거쳤지만 서울을 목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만영의 <축제>와 공동으로 이루어진 기념회에는 가람·안서·기림을 비롯하여 문단 지우 30여 명이 모여 자못 성황을 이루었다. 소운·육사陸史·석초石艸·원조源朝·임화林和도 모두 처음 대하는 얼굴들이었다. 그 뜨거웠던 악수는 지금도 내 체온의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것만 같다.
그 뒤 세상은 자꾸 어두워만 갔다. <문장>지에 기고한 시가 두 차례나 교정쇄에 붉은 잉크로 상처를 입고 되돌아오더니 끝내 <문장>지는 폐간을 하고, <인문평론>이 <국민문학>이라는 일문日文 잡지로 둔갑을 하고 나서, 일본말로 써내라는 협박장에 가까운 원고 청탁서가 날아들더니 끝내 문인들은 뿔뿔이 헤어져 금강산으로 들어가는가 하면 시골로 모두 떠나고 서울에 가야 국민문학에 종사하는 어용들 외에는 좀체 만날 길이 없었다. 국민문학사 (인문평론)에서 일문으로 시를 써 보내라고 성화를 내던 것도 그때의 일이다.
해방이 되던 이듬 해 출판된 제2시집 <슬픈 목가>는 그동안에 숨막혔던 속에서 써 두었던 작품들이다. 그동안 흩어졌던 문인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나도 서울로 기어 올라왔다. 1년을 꼬박 참고 견디다가 나는 또 다시 귀향을 하고 말았다. 해방된 서울은 너무도 숨이 막히는 곳이었다. 시골 중·고등학교를 전전하다가 전주로 온지도 벌써 17년. 이젠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30여 년을 살다 온 청구원은 내 마음의 고향, 그 옛날 심은 은행나무·벽오동나무가 이미 아름드리 거목이 되는 동안 손자는 고등학교엘 다니고 나도 그 거목보다 허망하게 이순이 넘었다. 전주에 나와서 얻은 제3시집 <빙하>가 있고 지금은 제본을 서두르고 있는 <산의 서곡>이 네번째의 수확이 된다.
자연의 품에 깊숙이 묻혀 꿈과 낭만을 엮던 <촛불> 시절을 생각하면 옛날 다녀온 먼 여로에서 눈여겨보았던 산줄기만 같아 몹시 그립다. <슬픈 목가> 시절은 악몽 같으면서도 뼈에 저리도록 망각할 수 없는 나의 역정이다. <빙하>가 허전한 생활을 다스리면서 내일을 모색하는 안간힘이라면 <산의 서곡> 또한 몸부림에서 오는 저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금 나는 <촛불>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내가, 그리고 여러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의욕과는 너무나 먼 세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산의 서곡>을 내 인생의 오버츄어로 삼고 싶다.
인생을 휘나레할 때까지 나는 줄곧 시와 더불어 살리라. 시를 쓴다는 것은 시에서 살고 싶은 욕망에서 발로된 행동의 일단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