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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4 16:42
나의 문학적 자서전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482  
 
나의 문학적 자서전


꿈 많은 소년이었다. 항상 우리 고을 주변에 알맞게 자리 잡고 있는 나지막한 구릉의 잔디밭이 아니면 산 언저리 백화등이 칭칭 감고 올라간 바위 밑을 찾아가서 어슴어슴 황혼이 먼 바다를 걸어올 때까지 오랑캐꽃빛 섬이나 저녁놀 붉게 타는 수평선을 덧없이 바라보면서 아득한 꿈을 멀리 띄워 보내고 망연자실하는 것이 내 소년 시절을 거의 차지하던 일과였다. 이렇게 지내오는 동안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의 <우사기노템뽀>와 나스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단편을 거쳐서 투르게네프의 <사냥꾼 일기>에 맛을 붙이게 되고 하이네의 <서정소곡>에 군침을 흘리는 문학소년이 되었다.
열여덟 나던 3월 어느 날 유달리 기다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키가 후리후리한 청년이 우리 집에 나타났다. 어찌 그 청년이 우리 집을 찾아왔는지 그 용무까지는 내 알 바 아니었으나 그 청년은 남궁현南宮炫이라는 영광 사는 나의 아버지의 진외갓집으로 아잿뻘 되는 사람이었다. 그 청년이 며칠을 묵게 되는 동안 나의 하잘 것 없는 문학 취미를 눈치챘던지 그의 간단한 여장- 작은 책보에 꼼꼼히 싸 가지고 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창조>지를 내게 보여주면서 그는 일장의 문학담을 해 주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진한 오렌지빛 책가위에 금자로 찍어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차라리 가지고 놀고 싶은 책이었다. 일찍이 춘원의 <무정>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찢긴 뒤로는 처음 대하는 책이었고 녹색 표지로 얄팍하게 꾸며낸 <창조> 또한 처음으로 대하는 우리 말 잡지였다. 그때 처음 읽게 된 요한의 「불놀이」와 「봄달잡이」는 시방도 서슴없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이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하늘에서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이렇게 산문조로 시작된 「불놀이」의 저류하는 리듬이라거나,

봄날에 달을 잡으러
푸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
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
달은 물을 건너가고요….

하는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봄달잡이」의 멜로디는 그 당시 몇 편 얻어 읽은 안서의 감상과는 그대로 천양의 차가 있는 새로운 세계의 것이었다. 더구나 “달은 건너 가고요…”의 ‘가고요…’에서 나는 그 얼마나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머리가 사뭇 희l랍 철학자처럼 긴 이 문학청년의 로맨틱한 문학담에 나는 완전히 매혹되었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그때 들은 이야기였다.
이튿날 그 청년은 우리 마을에서 한 20 리 남짓 떨어져 있는 계화도界火島라는 섬엘 놀러 가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난생 처음으로 그를 따라서 섬 구경을 나서게 되었다. 일찍이 계화도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가 간재艮齋 선생이 체류하던 곳이요,내가 6, 7세 때에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 문하에서 오래 공부하시던 섬이었기에 계화도라면 언젠가는 한 번 가보고 싶은 섬이었고 날이면 날마다 산 언저리에서 바라보던 섬이었다. 그 청년을 따라 섬에 건너가 어느 주막에 들러서 갓 잡아온 쭈꾸미 회에 막걸리를 마시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아마 내 애주의 역사도 어찌 생각하면 그때부터 비롯했는지 모른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해안에서 우리들은 조개껍질도 주워 모으고 사장을 걷기도 하면서 밀려오는 들물에 벅차는 가슴을 그저 바다에 맡겨보는 것이었다. 언덕에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 이야기하다가 이윽고 우리는 내기를 하기로 했다. 식물을 채집하되 종류를 많이 채집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긴긴 봄날 하루해를 보내다가 물때가 되어 우리는 아침에 들렀던 주막에 가서 역시 쭈꾸미 안주에 막걸리를 반주로 점심을 끝내고 썰물을 따라 섬을 나오게 되었다.
바닷길 10리를 걸어오는 도중에 곧장 수평선을 넘어 가는 해를 처음 보게 된 우리들은 감격하였다. 오던 길로 「기우는 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얽어 바로 그에게 보였더니 여간 감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이었던지 기억에 오르지 않으나 3연 12행쯤 되는 단시로, 다만 기억되는 것은 맨 끝줄을, “해는 기울고요…” 하여 요한의 「봄달잡이」의 기법을 채용했던 것만은 잊히지 않는다.
이 졸작이 그때 조선일보 지상에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1단의 스페이스를 차지하게 된 것도 전혀 그의 지나친 찬사의 부산물이었으리라.
그때 조선일보 학예부에는 소설가 성해가 계시던 때였는데 내가 어려서 배우던 보통학교의 은사일 뿐 아니라 종매부였던 관계로 가끔 처가골을 오게 되었다. 자주 소적이라는 이름의 투고를 받아보고 퍽 궁금하게 여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얼마 뒤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시작에 손을 대게 된 나는 당시의 3대 신문 조선·동아·중앙지를 무대로 매월 몇 편씩 발표하게 되었다. 그 무렵 자주 이 지상에서 만나게 된 시인이 임화·김창술·김해강 들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섣불리 들어선 문학의 길을 단념할 것을 맹세하고 일삼아 써 오던 일기 잡문 시 나부랭이를 고스라니 불사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 나이에 찾아오는 풀 길 없는 인생의 고독과 낭만은 역시 문학밖엔 의지할 데가 없었던지 다시 책을 모아들이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탐독하게 되었고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다가 시집을 사들이곤 하였다. 한문 공부를 하는 한편 노장철학을 섭렵해 보려고 무진 애도 써보고 도연명의 소박한 시를 애독하는가 하면 타고르의 세계에 파묻히던 때도 바로 그때였다.
그 무렵에 우리 고을에는 사백을 중심으로 야인사라는 문학서클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새로운 사조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로 매월 원고로 회람하는 작품활동과 아울러 독일어 공부도 하게 되었다. 나도 그 틈에 끼여 적지 않는 문학적 자극을 받았건만 독일어는 영 팽개치고 말았다. 안서 선배가 에스페란토 지방 강좌를 우리 고을에서 갖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 뒤 낙원동 유일여관에 계시던 안서와 서신 왕래가 잦았으나 실지 만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밤을 세워가며 편지를 마련하던 일이 역력하다.

만주사변이라는 일제 침략의 전초전이 일어나기 직전 나는 청운의 뜻을 품고 마명馬鳴의 소개를 얻어 가지고 석전화상石顚和尙이 계시던 동대문 밖 중앙불교전문강원의 문을 두드렸으니, 그것이 1930년 3월의 일이었다. 불경을 배우는 것은 강원에 있게 되니 의무로 지워진 나의 일과였고 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것이 그때 나의 본업이었다. 30여 명의 젊은 승려 학도들이 득실거리는 틈에서 문학에 뜻있는 승려를 규합하여 <원선圓線>이라는 프린트 회람지를 만드는 것이 또 한 가지 나의 일이었다.
지금은 광주에 있는 조종현 형도 나와 같이 그 강원에서 공부하던 선암사 출신의 승려로, 그때 매일 같이 동요를 써내던 친구인데 그 뒤 노산을 찾아다니며 시조를 배웠고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동광지에 숱하게 시조를 발표했었다.
<시문학> 3호에 「선물」이 발표된 것이 인연이 되어, 하루는 용아(박용철)에게서 엽서가 날아들었다. 동대문 밖 지리에 소홀하니 틈내서 한 번 오라는 극히 간단한 사연이었다. 바로 낙원동 시문학사(용아의 집)를 찾아가서 막 인사를 끝내고 앉았노라니 검은 명주 두루마기에 버선을 점지하고 얼굴이 검은 데다가 유달리 웃인중이 긴 청년과 털털한 양복 청년이 들어오게 되어 알고 보니 검은 명주 두루마기의 촌뜨기가 지용이었고, 양복 청년이 화가 이순석이었다. 이하윤도 거기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되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벌어져 거나하게 되자, 지용은 자작시를 비롯하여 영랑, 편석촌, 나의 시를 서슴없이 유창한 솜씨로 읊어내리는 게 마치 구슬을 굴리는 듯하는 것이었고, 순석은 파리에 가겠다고 연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그날 밤 나도 어찌나 폭주를 했던지 서대문 성해 댁까지 오는데 기어오다시피 찾아왔었다.
그 뒤 우리는 자주 시문학사에서 만나게 되었고, 「봄은 전보도 안 치고」의 새로운 감각을 짊어지고 나온 편석촌의 작품도 자주 대하게 되었다. 그때 편석촌은 성진 고향에 있을 때였으니 그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 조종현 형과 더불어 요한을 찾아 동광사에 갔던 것도 그 무렵이었고, 중앙불교종무원 불교사로 만해 한용운 스님을 찾아 간 것도 그 무렵이었으며, 춘원을 찾아 동아일보사로, 서해曙海를 찾아 매신 학예부로 마치 무슨 순례나 하듯이 돌아다녔다. 사무적이고 쌀쌀한 요한의 풍모는 두 번 다시 찾아볼 용기를 낼 수 없었고 거만 무쌍하면서도 다정한 만해 스님은 아주 붙일 맛이 두터웠다. 시방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매신 현관에서 그 초췌한 얼굴로 우리를 보내던 서해의 초라한 모습이다. 서해는 그 뒤 얼마 안 되어 타계하였으니 그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춘원은 그 뒤에도 마명의 원고 부탁도 있고 하여 가끔 찾아가게 되었다. 언제나 정중하고 다정하게 맞아 주는 것이 마치 인자한 스님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 이듬해(1931년) 나는 그 길로 입산을 하느냐 귀향을 하느냐의 기로에서 오래 망설이다 입산을 단념하고 그대로 귀향을 하게 되었으니 마명과 같이 꿈꾸던 신문사 창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뒤의 일이었다.
영국 시인 카펜더를 본떠 농촌에 엎디어 꾸준히 공부할 것을 새로 다짐하고 막상 귀향은 했으나 그 당시 농촌의 현실은 나의 꿈을 살릴 수 있는 그런 평온한 지대는 아니었다. 10여 두락의 소작으로 호구지책을 세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죄로 백수의 탄식을 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때로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모내기 김매기의 뒷서두리도 해보고 채마밭을 가꾸어 보기도 했건만 노동이란 하루 이틀에 뼈에 젖어드는 용이한 것도 아니었다. 이런 빈한 속에서 깐에는 인내하고 싸워 나가는 동안 그래도 문학만은 필생의 업으로 삼으려니 굳은 각오도 해 보고 밤을 새워 독서와 사색에 여념이 없던 때도 바로 그때다. 아마 나에게 참다운 생활이 있었다면 그때가 절정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도 내 학문의 재산이 남아 있다면 그 무렵에 읽고 생각했던 것의 잔재에 불과할 것이다.
서정주, 장만영의 젊은 시우가 찾아오던 때도 모두 그 무렵의 일이다. 정주의 패기만만한 기백이라거나 만영의 백절불굴의 노력이라거나 안서 선배와 편석촌의 격려가 모두 내 하잘 것 없는 문학 수업에 잊을 수 없는 높은 자극제가 아닐 수 없었다. 뒤이어 가람, 운 두 선배가 찾아 주었으니 그 때 운과 화답하던 시는 시방도 잊을 수가 없다.

예서 부안이 북으로 백오십 리
모르던 옛날에는 천오백리만 여겼더니
이제는 시오리 남짓, 되나마나 합니다.

내 고장 산과 물이 부안만이야 하리마는
해불암 하루 저녁 쉬어감직 한 곳이니
신나무 제 철이 되거던 한번 찾아 주소서.

엽서 한 장 주고받는 데도 정이 서려 있고 만나서 펴는 정이 또한 극진하였으니 어디 오늘날 반목질시하는 문단에서 찾아볼 수나 있는 풍속이리오.
장만영과 동서로 맺은 인연으로 나는 매년 배천 온천에 가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오고가는 길에 서울에 들려서 여러 문우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지용·편석촌·김광균·서정주·이봉구가 모두 그때 친숙해진 벗들이다. 그 무렵 문단엔 <문장>과 <인문평론>이 두 성좌처럼 자리잡고, <자오선> <시인부락> <풍림>을 필두로 동인지가 족출하던 때요, <시건설>�이 중강진에서 <시원>은 서울에서 꾸준히 나오게 되어 문단도 그대로 백화 찬란의 전성기였다.
지용·영랑 시집이 시문학사에서 나오게 되자, 뒤이어 편석촌의 <기상도>가 나오고, 백석白石의 <사슴>과 만영의 <축제> 그리고 나의 <촛불>이 모두 그때(1939년)에 출판되었다. 빈한과 인고 속에서 겨우 결실된 것이 <촛불>이었으니 노장철학을 바닥으로 하고 도연명과 타고르와 솔로에게서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다.
작건 크건 한 시인이나 작가가 의지하는 철학이 없다는 것은 캔버스 위의 2차원의 평면에서 만족하는 화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공간 구성이 없는 한 어찌 거대한 인간상의 집약을 찾아 낼 수 있으랴? 일정의 억압과 착취가 범람하는 그 당시 나는 일제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용감한 청년이 못 되었다. 예술의 목적을 싸우는 데만 둘 수는 없었다. 생활을 승화시킨 꿈의 세계에서 미의 절정을 찾아내려 하였을  때 사람들은 흔히 나를 가리켜 목가시인이라 불러 주었다. 다만 일제에 저항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울 뿐 그렇게 불리는 것을 탐탁하게 여긴 바도 없거니와 그렇게 불쾌하게 여긴 적도 없다.
그 뒤 일제는 최후 발악을 시작하여 끝내는 미친개처럼 날뛰었으니, <문장>은 폐간을 당하고, <인문평론>은 <국민문학>으로 둔갑을 하였다. 뜻있는 문인들은 산 속으로 시골로 모두 도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애당초 시골뜨기라 있는 곳이 도망해 온 곳이었지만 작품 한 번 발표할 데 없이 그저 숨 막히는 속에서 술과 친구에 휩쓸려 그저 목숨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