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루기貧陋記
1. 빈루기
요즈음 S를 만나면 아주 지치도록 우울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면서 ‘우리가 고생을 하는 건 섣불리 붓대를 잡은 죄다짐을 하는 게지’하고 서글픈 웃음을 웃기 일쑤다. 어떤 시인은 인간의 비극은 개돼지가 아닌 데서 출발했다고 말했지만 우리의 불행이 빚어내는 비극은 아무래도 어설피 붓장난을 비롯했을 때 이미 따라온 비극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조 말엽에 그 씨식잖은 아전질을 그나마 일제에게 앗기고, 데카당도 반항도 아닌 다만 회고적인 감상을 저 중국에서 물려받은 칠언절구쯤 된 한시 구절로 얼버무리며 여생을 보내던 우리 할아버지들이 단발하는 것과 왜말 지껄이는 것을 한사하고 막아내시면서, ‘자식을 영 버려 놓는다.’고 아버지에게 얼굴을 붉히던 일이 바로 엊그제같이 떠오르곤 한다.
어찌 생각하면 그 대원군같이 보수적인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차라리 이 손아귀에 괭이나 쥐고 뼈대가 굵기 전에 등에 지게나 붙였다면 오늘에 와서 S를 만나되 그렇게 아주 우울한 얼굴을 서로 보는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요, 붓대로 저지른 죄다짐을 한다는 서글픈 대화도 아예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일전에 어느 책사 앞을 지나다가 S는 ‘오늘도 저 집에 책을 맡기고 쌀값을 얻어왔노라’고 역시 서글픈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처음 여기 와서 S를 찾아 갔을 때 그의 서가가 그래도 커다란 상처 없이 그대로 온전한 것을 보고 저으기 놀랬었는데, 한두 대의 오일페니실린으로는 당최 치료할 수도 없는 난치의 열병이 난 듯한 요즈음 쌀값을 메우기 위하여 그의 서가에도 뜻하지 않은 상처가 날로 커갈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마치 폐를 앓는 친구의 막아 낼 수 없는 공동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어찌하랴?
그러나 S여 ! 쑥대밭이 된 지 이미 오랜 내 서가를 구경하지 않은 그대는 행복하다. 나의 서가는 벌써 3기를 넘은 폐병 환자의 구출할 수 없는 비극일 게다. 어느 책에선가 나는 중국의 장서가들이 책을 사들일 때에는 으레 세 권씩을 사들이는데 한 권은 스스로 읽는 책, 한 권은 남에게 빌려 주는 책(이것은 간혹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나머지 한 권은 서고에 영원히 간수하여 두는 책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이야기요 또 돈 있는 장서가의 할 일이지 우리같이 가난에 쪼들린 한사寒士에게는 꿈이나 꿀 일인가.
S가 들으면 서운히 여길 일이지만, 내 서가에도 S의 서가만치 책이라도 남았으면 백미白米가 제 아무리 장질부사 이상의 열병을 앓더라도 한두 달쯤은 안심을 하리라. 나는 아주 책에 대해서는 이쯤 잔인해졌고 S보다는 썩 무자비한 편이다. 처음에는 손때가 찌든 서가의 책을 몇 번이고 꽂았다 뺐다 하고 망설여도 보았으나 끝내는 그 어린 새끼들의 안쓰럽게도 까만 눈망울을 볼 때 나는 흡사히 거미줄에 걸려 몸부림치는 예쁜 나비를 엉금엉금 기어나와서 무참히도 창창 감아재끼는 거미처럼 아주 책에 대하여 잔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S여 ! 웃지 말아다오. 생활은 책도곤 아름다운 것을 어찌 하리오? 나도 처음엔 차곡차곡 꽂아놓은 책을 종이장수가 저울에 달아서는 새끼로 꽁꽁 묶어가지고 나갈 때 오래오래 두고 길러오던 짐승을 올가미에 목을 걸어 내놓는 것만 같아 엉엉 사뭇 울고 싶었다오. 내 책을 여러 차례 걸쳐서 묶어가던 금바우라는 청년은 시방도 나 같은 또는 S 같은 사람의 서가에서 개를 잡아가듯이 오늘도 책을 꽁꽁 묶어내고 있는지…….
S여 ! 날로 비어가는 그대 서가의 공동은 미국에서 들어왔다는 저 유명한 마이신 주사만으로 막아 낼 수 없는 것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S여 ! 우리는 안심해도 좋습니다. 지가증권을 팔기 위하여 분주히 부산까지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청빈을 사랑하는 것은 가난한 국토에 태어난 우리들만이 지닌, 그리고 지닐 수 있는 미덕이 아니겠습니까.
2. 구두
P의 구두는 늘 아가리를 벌려야 했다. P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구두뿐이 아니겠지만 유독 구두에는 더욱이 그의 관심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P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가 T신문 지국 일을 맡아보게 되면서부터인데 그때에 이미 구두는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탈색 미군 쓰봉도 궁둥이가 해진 것을 입었었는데, 이번에 만났을 때에도 역시 그 모양을 하고 신이 나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 어찌 보면 퍽 부러웠다. 의복이니 구두니 하는 따위에 P의 관심이 제외된 지는 이미 옛날인 성싶다느니보다도 도시 그의 몸뚱어리에 의복을 걸치는 것부터가 거추장스럽고 신발을 꿰는 것마저 야성적인 P에게 있어서는 맨발도곤 괴로운 과업인지 모른다.
딴은 P의 이미 탈색되고 펑크가 나고 실밥이 터져 아가리를 벌린 구두가 그에게 무슨 관심의 상대가 될 리가 없을 게다. 그러나 30이 갓 넘은 그에게 마카오는 그만두고 대마지 양복이라도 입히고 하다못해 칠피 구두쯤 신겨 보아라. 그도 요즈음 말로 근사한 신사가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바로 며칠 전 일이다. P가 뜻밖에 T신문 본사에 나타났다. 그가 나타난 것쯤이야 지국 기자니까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나뿐 아니라 여러 친구들을 놀라게 한 것은 흡사 삽살개 주둥이같이 아가리를 노상 벌리던 구두가 아니고 윤이 빤짝빤짝 나는 검정 반장화를 신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치 P의 구두는 유명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구두가 세이버 제트기의 조종사가 신는 것이라고 예의 탈색 미군 쓰봉 가랑이를 걷어 보이면서 의기양양한 것이다. 구두 목다리에는 자크와 작은 호주머니까지 달려 있는 아주 훌륭한 중고품 반장화였다.
우리나라에 동란이 없었던들 제트기가 날아올 리 없고, 제트기가 날아오지 않았던들 폭탄 냄새 기관포 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제트기 조종사의 구두를 P가 신을 리도 전무한 일이다.
P를 보내놓고 나는 한 동안 그의 구두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가리를 벌리기에는 아직도 성성한 나의 구두(돌이 넘은 지 오래지만)에 관심이 너무 컸던 것을 후회했기 때문이다.. 기실 P보다도 오히려 펑크 난 마음의 상처가 큰 내가 이따위 구두에 대해서 어찌 관심을 해야 하는가?
P보다도 10년이 훨씬 늙은 내가 아직도 P를 졸업하지 못하였기에 더 하잘것없이 느껴져서 괴로웠다느니보다도 커다란 공허감을 어쩌지 못했다. 몸치장으로 그 사람의 전 인격을 저울질하는 이 썩어빠진 풍속에 나는 언제부터 감염이 되었을까?
주말여행이라면 좀 호사스런 이야기지만 만나서 같이 막걸리라도 나눌 수 있는 P가 보고 싶고 그의 초탈한 풍채가 그리워서 지난 토요일도 나는 불현듯이 군산엘 갔다. 막차가 너무 늦어서 T신문 지국에는 그들이 이미 돌아갔을 때여서 혹시나 하고 비둘기다방에 갔더니 그는 영 보이지 않았다. 제트기 조종사의 구둘 신고 술을 애인보다 사랑하는 그가 다방에 나타날 리가 없다. 지금쯤 P는 어느 선술집이 아니면 하꼬방에서 물경 2백 환에 어느 구두장이한테 사 신은 세이버 제트기의 조종사가 신었다는 예의 구두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한참 흥겹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튿날 T신문 지국엘 나갔다. 젊은 기자 S가 혼자 앉아 있었다. 조금 뒤에 C가 왔다. 뒤따라 B와 P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제법 윤이 나는 검정반장화를 신고 자신만만한 걸음걸이에 미소를 띠는 P는 만년 명랑한 청년이다. 그의 손을 잡는 것이 반갑다기보다 그의 검정 반장화를 보는 것이 더 반가웠다. 곰같이 말이 없는 B와 반장화의 주인공 P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학병에 끌려가 중국을 쏘다니던 이야기, 난봉을 부리던 이야기와 더불어 B와 함께 부르는 엉머구리 같은 썩 서투른 유행가도 즐거웠지만 반장화를 신고 나오면서 하는 그의 구두의 역사를 강의하는 것이 더 즐거운 것이다.
P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세이버 제트기의 조종사의 구두를 신고 이 거리를 쏘다니며 그의 인생을 조종하기에 피로할 것이다. 저 구두가 아가리를 벌리기에는 요원한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 동안 P는 탈색되고 펑크 난 그의 멍든 마음을 메워야 하고 또 달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P는 차라리 그의 인생에 기관포와 폭탄의 세례를 퍼부어서 새로운 고지를 점령하고 사수할 태세를 갖추었을는지도 모른다. 내 구두도 아가리를 벌리게 되면 P에게 부탁해서 검은 반장화를 한 켤레 구해 신으리라. 세이버 제트기 조종사 P에게 행복 있을지어다.
3. C와 사만 원
爲草當作蘭위초당작란
爲木當作松위목당작송
蘭幽香風遠난유향풍원
松寒不改容송한불개용
李白이백 <於五松山贈南陵常贊府어오송산증남릉상찬부>
풀이라면 난초가 되든지
나무라면 솔이 되어야지
그윽한 난향은 멀리 날고
솔은 추워도 낯꽃을 안 바꾸지
온종일 멎지 않고 내리던 비가 해질 무렵에는 놋낱같이 쏟아지고 말았다. 해는 이미 졌고 황혼이 되었는데도 어슴푸레한 게 당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지금 스물다섯 명의 대 가족이 밤이 다가오는 것을 그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앉아서 낮때가 됨직해서 들려 내보낸 자루에 보리건 밀가루건 무엇이고 배를 채울 것이 담겨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생각할 때 우리들의 가슴은 갑자기 그 무슨 커다란 바위에 억눌린 것처럼 아무 말이 없으면서도 금시 컥컥 숨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때에 그 자루에 쌀이 그 옥같이 하얀 쌀이 담겨 올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봄 이후에 단념보다는 차라리 까마득하게 망각하고들 살아오는 스물다섯 명의 가족들이다. 오늘 밤에도 이들에게 풀칠을 해 주려면 최소 3·4만 환의 자금은 꼭 필요한 것이다. 나는 빌려올 수 있는 곳을 모조리 생각해 본 끝에 거절당하지 않을 정도의 상대편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좀체 그럴싸한 상대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요즈음 일산 기와집을 사들이고 백여만 환의 수선비를 들여서 대목 일을 하고 있다는 종제쯤 되는 H에게 일대 용기를 내어 쪽지를 적어 보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마음조려 기다리던 회답回答은 극히 간단했다.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한 푼이란 물론 천 환을 가리키는 단위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의 호주머니에 한 푼도 없다는 게 될 말이냐……. 방법에 있어서 엊그제 거절을 하던 수법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좀 불쾌하였다. 처세의 제1과 제1장을 그들은 이렇게 수업했고 또 졸업했으며 그것이 이젠 실천단계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런 방법이 대수·기하는 물론 아니고 미분 적분은 더구나 아니고, 그저 가감승제 정도의 가장 용이한 것인데 내가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내 자신의 처세법의 공부가 영점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또다시 생각해 낸 것이 이 고을에서 어느 신문 지국을 하고 있는 친구로 아까 H에게 보낸 내용의 쪽지를 보냈으나 그 역시 부재중이라고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다. 차라리 있고서 거절을 당하느니보다는 어딘지 단념하기에 불쾌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대로 모든 교섭은 절망이다.
최후로 중국인 C에게 교섭을 해 보기로 되었다. 이것은 스물다섯 명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세대주의 한 사람이요 또 나의 형인 태고당太古堂 주인이 물론 썼다. 심부름 갔던 애가 그대로 돌아오자 태고당도 영영 단념을 하고 자루를 들고 왔던 막내아들을 데리고 돌아가고 말았는데 이윽고 C가 찾아와서 아까는 수중에 없어서 그대로 보내놓고 어찌 미안하던지 딴 데 가서 취해 가지고 왔다고 서투른 우리말로 4만환을 내주며 태고당 주인을 찾는다.
이리하여 한국 대 중국의 국제적인 양곡 원조 자금 교섭은 이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어서 이 4만 환 돈이 보리나 밀가루로 바꾸어져야 스물다섯 명의 졸라맸던 허리띠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 오고 싸전은 이미 문을 닫은 뒤라 4만환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루를 들고 왔던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나서는 길에 보슬보슬 오는 비는 어느 봄밤을 걸어가는 것처럼 마음이 거뜬하였다. H나 O나 또는 다른 밥술이나 먹는 친구들도 역시 한국의 가난뱅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렇게 마음이 가난하고 마음이 가난하기에 그렇게 좁을 게다. 그들이 만일 광막한 만주 벌판을 한 번쯤 구경만 했더라도 3·4만 환의 거래를 하기에 그렇게까지 인색하지는 않을 것이요 대륙적 아량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쪽지에 쪽지로 대답할 예의쯤은 갖추었을 것이며 이런 국제적 한·중 양곡 원조 교섭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집에 오니 식구들은 어두컴컴한 석유 등잔불을 켜놓고 오보록이 모여앉아서 호주인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윗집 태고당을 찾아가니 역시 끄름이 숱하게 오르는 등잔불 아래서 백발이 성성한 아버지는 저녁도 안 드셨을 터인데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을 읽고 계신 것이 어떻게 가슴 아픈지 갑자기 눈시울이 뜨겁고 그대로 달려들어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실컷 울고 싶었다.
4. 셔츠 이야기
겨울이 올 때마다, 그리고 셔츠를 갈아입을 때마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일이 있다. 벌써 6 년 전 겨울 어느 날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T신문사 편집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동아이가 제법 큼직한 소포뭉치를 들고 나를 찾는 것이었다.
지금이나 예나 다름없이 그때에도 찌들은 가난 속에서 단판 씨름을 하고 있던 때라 뜻하지 않은 소포뭉치에 호기심이 적이 컸다.
목포 항도출판사에서 보내온 사화집詞華集(시와 산문)이었다. 동봉한 H의 글발에는 ‘<시와 산문> 25부 보내니 올 겨울에 셔츠라도 한 벌 장만하라’고 극히 간단한 사연이 쓰여 있었다.
궁한 심정에서 허덕이는 그런, 말하자면 좀 저속한 감격이라느니보다는 그것을 보내준 H의 뜨겁게 아름다운 마음씨에 나는 그만 그 사화집을 손에 든 채 뜨거워오는 눈시울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그 사화집을 몇 군데 나눠주고 남기에 행여나 셔츠로 바꿔질까 하고 어느 글 쓰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지만 오늘까지 영영 돌아오지 않는 ‘노라’의 신세가 된 것을 생각할 때, 그 친구에게 보내는 증오보다는 도리어 H의 호의를 차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괴로운 것을 지울 길이 없었다.
얼마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자신의 셔츠 한 벌도 번번이 갈아입지 못하는 군색한 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까지 그런 온정을 베풀어 준 H의 그 뜨거운 정은 아마 내가 이승을 떠나는 날까지는 아예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무렵에 나는 궁여지책으로 제3시집을 H가 일보고 있는 그 출판사에 교섭을 해오다가, 다행히도 서울 어느 출판사로 돌리게 되어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C의 동시집 <무지개>를 거기서 냈으면 싶어, 부랴부랴 C에게 원고를 정리시킨 뒤, 그를 데리고 목포에 가게 된 것이 사화집을 받은 지 3 년째 나던 1955년 4월이었다.
3 년을 두고 서로 글말만 주고받던 H를 처음 찾아 가게 된 것이다. 만나자 일면여구一面如舊가 된 사이라 C의 동시집 출판은 그 자리에서 선선히 승낙을 얻게 되고, 그해 5월에는 바로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를 맞아준 H의 첫 인상은 온후하고 다정하기 깃을 벌린 암탉이 병아리를 받아들이는 그것이었다. 분에 넘치는 괴롬을 끼치고 돌아오는데도 어떻게 섭섭해 하던지, 되레 민망하고 괴로울 정도였다.
뒤이어 자주 오는 H의 그 숫한 글발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마음 느긋한 삶의 보람을 새삼 느끼는 한편 그 의젓하고 조촐한 그의 마음에 나의 안식처를 발견하곤 하는 것이었다.
벌써 재작년 가을인가 보다. 논산훈련소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가는 길에 나를 찾아 온 것이 그대로 마지막 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자주 오던 글발이 한동안 뜸하더니 들려오는 소식이 병석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해마다 벼르던 제주도행을 꼭 결행하게 되면 그 길에 H를 데리고 같이 가려니 하다가, 그대로 지난해 여름도 선뜻 넘기고 개학 임시해서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의 글발 대신 입적의 비보가 내 책상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 하잘 것 없는 교우록에 영원히 메꿀 수 없는 또 하나의 공석을 마련해 놓고 H는 영영 이 지구의 표면에서 그림자를 감추고 만 것이다.
두번째 내가 목포를 다녀오던 4년 전 봄에 역두에서 나를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던 H의 바람결에 날리던 흰 머리칼이 눈에 선하다. 아니 재작년 가을에 다녀가면서 오는 여름에는 제주도를 꼭 같이 가자고 굳게 손을 잡던 H의 체온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성만 싶은데 그는 영영 떠나고만 것이다.
H가 떠난 지 1 년이 지난 작년 늦은 가을에 나는 뜻하지 않게 제주도를 다녀오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나는 선창으로 달려야 했고, 귀로에는 배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차를 타야 했다. H가 없는 목포는 나에게 너무나 황량한 벌판이었던 까닭이다.
병석에서 신음하면서도 한 되 두 되의 양식을 부인으로 하여금 구하여 끼니를 메꾸고 주사약 한 대를 구하는데도 부인이 감당해 오다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하니 H를 살리기에 오늘의 천후天候는 너무나 불순하였고 너무나 무지한 환경이었던 것을 새삼 뼈아프게 느낄 따름이다. 깊이 인생을 깨닫고, 예술을 보는 그 혜안, 그리고 우리들의 온갖 멋을 누구보다도 파고 들어간 H는 지나치게 청빈한 무서운 양심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돈이라는 글자를 쓰려면 그 글자의 추한 땟국이 혹은 그 위아래 글자들이 번지기나 할까 무섭다는 듯이 돈의 글자에다가 묶음표를 지르던 적이 있었다. 내가 천대를 하는데 제가 추파를 보내 올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H의 수필 <돈>의 한 구절이다.
이렇게 청빈하고 날카로운 양심이 무서운 20세기 후반기의 암야暗夜에서 외롭게 불타다가 끝내 한 줄기 유성처럼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리하여 우리들의 지평선에는 또 하나의 양심이라는 빛나는 이름의 별이 떨어지고 만 것이다.
겨울밤이 깊었다. 지금 나는 H가 그렇게 걱정해 주던 셔츠를 두 겹이나 껴입었는데도 등덜미가 춥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가 보내준 마음의 셔츠를 입었기에 이 무서운 20세기 후반을 휩쓰는 추위를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