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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10 14:39
생활의 운치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192  
 
생활의 운치


“어디 우리에게 생활이 있나? 그저 생존하는 거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요, 또 교양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한다는 층에서 이런 푸념(?)은 더욱 많이 듣게 된다. 생존 자체가 생활을 위한 것이요. 생존을 위한 생존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생활다운 생활이 못될지언정 우리들의 호흡이 생존에 그친다면, 그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생활다운 생활을 영위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졌느냐면 그것은 우리들의 꿈이요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역사가 비롯한 뒤 한 번도 갖추어진 적이 없는 것이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어찌하랴?
만일 인간이 의욕하는 바 생활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이 지구가 깡그리 천국이 되는 날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설사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의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일 것이다.
그러기에 도연명은 오두미五斗米에 허리를 굽힐 수가 없어, 팽택彭澤의 현령을 내던지고 그 무서운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평담平淡 한아閒雅한 속에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마음을 달래야 했고, 끝내는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동쪽 울 밑에 피어있는 국화꽃을 꺾어들고  유유히 남산을 본다.)’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빵으로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빵 이전에, 그리고 빵 이후에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다. 본능의 행동화로 능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어찌 우리에게 비극이 있을 것인가? 차라리 비극은 인간의 정신사를 찬연히 장식하는 가장 고귀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우리는 돼지가 통곡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비게 덩어리에서 무슨 값진 눈물이 나오겠는가? 그러기에 시인이나 예술가의 목덜미에서 비게 덩어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도 노상 그들의 영양 섭취가 A급이 못되는 데만 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성싶다.
운치를 찾자면 사람은 야위기 마련이다. 아니, 날짐승을 두고 보더라도 알 일이다. 뉴햄프셔가 학을 따라 하늘로 날아갔다는 말은 아직 없다. 비행기는 월맹을 폭격하는 데도 필요하겠지만, 관광 지대를 찾아 밀월여행을 떠날 때에도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운치다. 뉴햄프셔가 우리에게 달걀을 공급할 때 학은 천공을 날아야 하고 저금통장을 계산하고 밀수를 음모하는 패거리가 있는가 하면 오류五柳 선생은 못될지언정 그래도 문 앞에 버드나무를 심고, 좁은 대로 뜰에는 잔디와 꽂을 가꾸는 운치를 잊지 않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살맛이 나는가 보다. 이렇게 혼탁한 속에서도 운치는 근절되지 않고 장강처럼 곤곤滾滾히 흐르기에 더 값진 것이리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정·의는 한정된 세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비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주어진 현실에서보다도 갖고 싶어 하는 현실의 실현을 위하여 아름답게 느껴야 하고 밝게 비판해야 하고 선하게 행동하여 부단한 전진을 의욕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나이 들수록 세사에 대범해지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라면,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데서 담담하게 여생을 올바로 보내자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이지만, 그 반면에 남에게서 해를 입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또한 나의 생활신조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밟히지도 않고 밟아서도 안 되겠다고 굳은 신념으로 다짐하곤 한다.
그렇다. 인간이 의욕하는 것은 가장 자유로운 속에서 아무 구애 없이 스스로의 개성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오늘이란 현실을 굽어 볼 때 무참히 짓밟히고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니 가슴 아플밖에…….
한 국가가 한 국가를 짓밟는가 하면 개인이 개인을 짓밟고 있지 않는가? 국가나 개인을 막론하고 짓밟는다는 것은 비극임에 틀림없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참다운 모습은 밟히지도 밟지도 않는 데서 제1과 제1장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운치 있는 내일의 생활을 위한 기본 문제의 해결은 바로 여기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는 날 시인은 비로소 맑은 목청을 다듬을 것이요, 천공을 비상하는 단정학을 선망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그 거리가 너무 아득하기에 시인과 더불어 우리는 한숨을 내쉬어야 하고 때로는 가슴을 쥐어뜯어야 한다.
일찍이 도연명은 술로 그의 울분과 빈궁을 달래던 나머지 ‘千秋萬歲後천추만세후 誰知榮與辱유지영여욕 但恨在世時단한재세시 飮酒不得足음주부득족(천만 년이 지나간 뒤 뉘 있어 영예로움과 욕됨을 알리오? 다만 한 되는 것은 내 세상에 있었을 때 마음껏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이로다.)’ 이런 데카당적 자만自慢을 써 놓았음을 볼 때 새삼 가슴에 파고드는 측은한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러기에 동쪽 울 밑에 피어 있는 국화꽃을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보았으리라. 그 또한 꿈에서 살고 꿈을 먹다가 꿈같이 떠나간 시인이다. 아아, 위대한 무상일진져 !
각설, 이미 울 밑에 개나리가 만개했고 뒤이어 수선이 터지더니 용담·도라지·더덕·백합이 지각을 뚫고 일어서느라고 수런대고 백목련이 화피를 벗는가 하면 후박도 움을 싸고 있던 그 투박한 껍질을 훌훌 벗어던지고 모란도 고물고물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더니 식나무도 묵은 잎새를 한 잎 두 잎 떨구고 있다. 고대하던 라일락·홍매가 첫 꽃을 선보이고 장미들도 다투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렇게 봄은 수다를 떨고 있건만 태산목·호랑가시·동백·낙우송 그리고 은행나무·석류도 봄을 외면한 듯 천연스럽게도 입을 다물고 영 말이 없다. 글쎄 ! 파초도 무장을 해제시켜야겠는데 아직도 아침저녁은 쌀쌀하니 걱정이다.
라디오에서 떠들어대는 약 광고 유행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시시한 친구들의 김빠진 이야기에 지칠 때에도 나는 좁은 내 정원의 어린 식물 가족을 보살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물론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인간이요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에서 티 없이 나오는 웃음이지만 어디 요즘에는 그런 인간을 대하고 그런 인간의 웃음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고 보니 차라리 정원의 어린 식물 가족들의 죄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 침묵 속에서 갸륵한 마음을 굽어본다는 것이 다시없는 나의 열락이 아닐 수 없다.
올 봄에는 시누대와 곁들여 오죽烏竹을 심어 바람과 햇볕이 머물다가 가게 하고 남쪽 울 밑에는 이팝나무를 심어 5월에는 백설 같은 꽃을 피게 하리라. 이 나무들이 풍기는 그 싱싱하고도 향긋한 내음 속에서 나는 그저 천천히 그리고 되도록 청수하게 늙어가리라. 내 만일 오류五柳 선생을 본받아 자만을 쓸 양이면 재세시在世時의 부족한 음주를 탓하기 전에 한 그루 나무나 한 포기 풀로 화신할 것을 초草하리라.

내 그림자를 거두는 날엔
한 그루 태산목泰山木으로 서서
저 수려한 거악巨嶽을 마주 보리라.

그도 아니면
천 년을 넘어도 오히려 솟구치는
의젓한 은행나무로 하고 서서
못다 한 한을 풀어 보리라.

그도 아니면
아아, 그도 아니면
한 포기 노루귀의 빨간 꽃잎술로
춘분春分에 앞서 봄을 핥으리라.

이 서투른 자만이 어느 가을날 황혼의 바람에 펄펄 날릴 때에도 저 오리나무 숲 너머 고덕산은 지금 보이는 저 모습으로 푸르게만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