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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8-09 13:21
왕유, 죽리관竹里館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9,171  
 
왕 유
王維(701-761)·자는 마힐摩詰, 산서성 태원太原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시명詩名을 날려, 12살에 진사에 급제하여 대악승大樂丞이 되었으나, 이내 산동으로 좌천당했다. 얼마 후에 벼슬을 버리고 서울 장안의 근교 망천輞川에 땅을 사 가지고 은둔의 생애를 보냈다. 31살에 아내를 잃고나서는 독신행을 계속하다가, 나중에 불교에 귀의했다. 735년 37살 때 장구령張九齡에 의해 우습유右拾遺에 발탁, 차차 벼슬이 높아져서 752년에는 이부랑중吏部郎中, 756년에는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고, 시명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곧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그 해 6월 장안이 함락되고 그는 적에게 잡혔다. 난이 평정된 뒤에 복직되어 759년에는 상서우승尙書右丞이 되었으나, 그해 61살로 죽었다. 그는 이백이나 두보에 비하면 마음이 약하여, 현실의 오탁汚濁에 초연할 수도 없고, 반항할 수도 없어, 청정한 자연과 서방왕생西方往生의 사상에 도피하여 배적裵迪 전기錢起 등과 사귀면서, 평범하지만 순수한 정신을 시와 그림에 담았다. 저서에 <망천집輞川集> 20권, <왕우승집王右丞集> 6권이 있다.
 
죽리관竹里館
 
홀로 고요한 대숲에 앉아
거문고 뜯다간 휘파람도 불어 보고
깊은 수풀이라 아는 이는 없어도
달빛이 소리 없이 비쳐 오도고......

竹里館
獨坐幽竹裏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